지금은 유실됐지만, 대학 때 두 문화를 각각 대표하는 《홍루몽》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교하는 글을 즐겁게 쓴 적이 있다. 두 작품은 지금은 사라진 세계, 동양과 유럽의 귀족 사회를 우아한 필치로 다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자들 틈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고 다소 한심한 구석이 없지 않은 두 아이, 가보옥과 마르셀 각자의 이야기인 소설들은 모두 저자들이 한번 가졌다가 상실한 세계에 대한 추억 속에서 쓰였다.
비극은 언제 생겨나는가? 자연의 테크닉에 맞추어 인간의 테크닉이 일하지 않고, 거꾸로 인간의 테크닉에 자연을 맞추려 할 때 생긴다. 온갖 환경문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알려오는 이 비극을 오늘날 우리는 실수투성이의 개발들에서 체험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테크닉이 자연의 테크닉을 압도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태어난 비극이다.
‘차이’는 너무도 깊이 삶 속에 스며들어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차이의 보호를 받는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나감에 있어서, 그리고 창조적인 생각을 꾸며나감에 있어서 말이다.
우리가 학습을 통해서 무엇인가로부터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을 때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기능하는지 생각해보라. 학습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형대로 유지하려 할 때 정신은 낡은 것을 수동적으로 보존하는 박물관이 되며, 수분을 빨아들이지 못하는 식물처럼 새로운 꽃을 틔우지 못한 채 말라 죽고 만다. A라는 것이 학습을 통해 주어졌을 때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기능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B와 C, 그리고 D라는 듣도 보도 못한, 서로 차이 나는 새로운 창조물들이 A로부터 ‘분화’되어 나왔다는 뜻이다. 이때 A란 흔적도 남지 않으며, 오로지 B, C, D라는 새로운 산물을 분화시키는 ‘차이’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이렇게 ‘차이’란 바로 창조적 사유가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생각하는 힘의 원천이다.
국가의 목적이 구성원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같은 주제넘는 일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그들의 세속적 행복 외에 무엇이겠는가? 결국 정치적 싸움이란 느려질 권리를 얻는 문제이다. 시간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삶은 그저 노동을 거쳐 사망으로 가는 쾌속 열차일 것이다.
쓰레기장은 해답을 찾기 어려운 절망적인 곳이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절망이 더욱 깊어졌다. 코로나는 한편으로 인간을 땅에 묻고, 다른 한편으로 일회용품 쓰레기의 무덤을 무섭게 쌓아올렸다. 죽은 인간과 죽지 못하고 쌓여 있는 쓰레기가 이 질병의 전리품이다.
어느 날, 이 모든 난관을 뚫고 재활용 쓰레기를 제대로 분리한다고 해도 실제 재활용 업체에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어줄 수 없는 쓰레기가 부지기수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 뭔가를 사고, 구매한 상품이 무엇이든 적어도 그 반은 쓰레기인데, 도대체 쓰레기는 어디에 숨겨지는 것일까? 한마디로 쓰레기는 버리는 사람도 치우는 사람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존재’이다.
오래도록 철학도 쓰레기에 대해 무지했다. 쓰레기는 ‘존재’이지만,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지혜 가운데 하나인 ‘존재론’은 쓰레기를 사유할 수 없었다. 쓰레기의 존재론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떤 이데아도 모범으로 삼지 못한 것, 정상적인 존재함에서 벗어난 것이 있으니 바로 쓰레기이다.
한 사물의 목적인 용도를 실현하느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파손된 사물이 구원받는 길은 ‘수선’밖에 없다.
이와 다른, ‘쓰레기 자체’를 취급하는 방식이 있다. "빈 병, 납작한 튜브, 오렌지 껍질, 닭의 뼈 등이 남는다.(…) 그 물건들의 무한한 잠재력 앞에서 나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11 여기서 핵심어는 ‘무한한 잠재력’이다.
그런데 저 구절은 쓰레기 자체가 ‘잠재력’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물이 종말 뒤에 쓰레기로서 잠재력을 지니며,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즉 재활용)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다.
결국 쓰레기의 존재론은, 한 사물의 탄생을 가능케 한 형상과 목적 자체가 ‘쓰레기라는 완성 지점’을 향한다는 것을 사유하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
장식이 들어가지 않은 생산품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장식품을 만나며, 장식은 생산물이 누리는 인기의 성패를 가름한다. 생산품에 밀착한 이 장식 예술을 ‘디자인’이라는 말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실 장식적인 것을 예술작품과 칼로 잘라내듯 구별할 수는 없다.
예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탐색은 ‘장식’, 즉 파레르곤을 제쳐두고는 가능하지 않다. ‘장식은 진정한 예술인 것이다.’ 무엇이 가장 대표적인 장식 예술일까? 바로 건축이다. 실용적인 기능을 지니지 않는 건축이란 없다. 건축에선 실용적 기능과 그 기능을 치장하는 장식적 아름다움이 서로에게 기생한다.
건축은 분명 실용적인 도구이다. 건축은 순수 예술처럼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실용적 기능을 목적으로 한다. 아무리 대단한 예술가가 구상했을지라도 실용적 기능이 없다면 건축물은 건설될 수 없다. 어떤 도시도 비실용적인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존재하더라도 실용성이 없다면 그것은 건축이라기보다 그냥 수수께끼의 흉물이 되리라.
따라서 건축에서는 순수하게 그 자신의 아름다움에만 머무는 예술작품은 가능하지 않다. 건축물은 먼저 예술이 아닌 실용성과 연결됨으로써만 세워질 수 있다. 건축물은 사무실이든 학교든 박물관이든 실용적 기능이 있어야 한다. 또한 건축물은 그것이 세워지는 공간(도시) 내 다른 시설들과의 조화를 고려해야만 한다. 건축에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이 두 가지, 다시 말해 실용성과 조화는 모두 순수 예술 외적인 것이다. 즉 건축의 예술성은 예술 아닌 것들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그러니까 건축의 아름다움은 실용적인 도구에 붙은 디자인의 아름다움이고, 도시에 부착된 장식의 아름다움이다.
결국 그림은 세상이 하나의 질서와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서로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다양성만을 지닌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다양성의 인정이란 바로 세상의 ‘자유’에 대한 승인 아닌가? 세계가 경직될수록 우리는 그림이 도달한 그 자유를 더욱더 소중히 바라보게 된다.
도대체 한 인간의 삶에서 빛나는 한순간이란 무엇인가? 누구에게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언제인지 사람들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중요한 줄도 모른 채 지나쳐버린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시간, 계속 스쳐 지나가는 ‘현재’는 그 자체로 충족적인 저 최고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지시해 보이는 ‘기호’일 것이다. 과거의 한순간은 ‘현재’를 빛나게 하고 현재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현재 순간에 대한 존중은 바로 ‘현대’의 특성이기도 하다.
현재라는 순간을 영위하는 것들은 과거의 것들이 변장한 모습이다.
과거는 박제나 골동품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와 단절한 채 완벽한 새로움 속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지도를 받으면서만 우리는 현재의 사건들을 인지할 수 있다.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루스트가 마들렌과 함께 차 한잔을 마시는 현재의 순간 속으로 과거의 콩브레가 들어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만들 듯이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우리는 나이가 든다. 세월이 삶을 실컷 갈아먹은 뒤 긴 숨바꼭질 놀이를 끝내듯 마주친 너는, 어느 처연한 겨울 앞자락에 선 듯 한두 점 하얀 깃털을 머리카락에 얹은 채 축제일의 밤처럼 환했던 지난 시절의 거리들을 쓸쓸하게 만든다. 거기서 우리는 웃고, 즐거웠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무엇인가 아까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으나, 지난 세월은 번잡한 거리에 쏟아진 금화들처럼 흩어져 이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렵다. 삶은 쇠락한다. 그러나 철학은 영원한 진리에만 하도 몰두해서 그런지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다.
인생은 아슬아슬하게 개울을 건너는 종이비행기처럼 유년에서 청년으로, 장년에서 노년으로 어떤 기적이 보호하듯 이어진다. 나이의 강이 흘러가며 하얗게 그려놓은 이 모든 시기의 모래톱들은 각기 독자성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시기의 독자성을 철학이 다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 자신이 ‘현재’와 일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재는 점점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어라고 그리움에 잠기는 것, 그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어라고 후회에 빠져드는 것 모두 ‘잃어버린 현재’에 대한 느낌들이다. 나이 든 자에게 현재는 ‘지나간 현재’이다. 그러나 철학은 ‘지금의 현재’ 속에서 ‘나 자신’과 ‘참된 것’의 ‘일치’를 추구해왔다.
이데아를 인식하는 영혼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데아란 세상 모든 사물들의 모범이고 원형이며 원인이다. 또한 이데아의 중요한 성격은 바로 ‘단순성’이다.
이데아가 늙지도 죽지도 않는 까닭, 영원불변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식으로 단순하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복합물이 분해되는 일이지만, 단순한 것은 분해될 수 없기에 이데아는 변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요컨대 영생을 누린다.
플라톤은 이런 이데아를 인식하는 우리 영혼도 영원불변하다고 믿었다. 영혼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영혼이 이데아와 같은 종류의 것, 즉 이데아처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데아와 똑같이 영원불멸한다는 것이다. 영혼이란 지나가지 않는 ‘영원한 현재’ 안에서 이데아를 응시하고 있는 의식이다. 그 의식은 이데아를 닮아서 나이 먹을 줄 모른다.
철학에서 ‘현재’는 늘 이렇게 특권적이었다. 철학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인간들은 이런 이상적인 현재의 영원성, 늙지 않음을 탐내왔다.
그러나 인간은 속절없이 나이를 먹는다. 저 빛나는 이데아처럼 영원한 현재 안에 머무를 수도 없고, 아름다운 한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멈출 수도 없다.
나이 드는 자는 결코 영원한 현재 속에서 불멸하는 이데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들면서 우리는 놀라고 지친 여름이, 사그라든 9월의 정원을 바라보듯 점점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능성이 하나둘 사라진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못하게 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이는 나쁜 게 아니라 당연하며 필연적이다(가령 결혼할 수 있게 되면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듯).
나이 들어서야 날개를 펼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눈으로, 지나간 현재의 진상을 이렇듯 뒤늦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생을 반추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인간은 어리석은 자라서 늘 뒤늦게 세월의 마지막 옷자락을 가까스로 부여잡듯이 배운다.
우리가 과거를 회고하며 참된 것에 대해 깨닫건 그러지 못하건, 인생을 완성하건 완성하지 못하건, 어쨌거나 우리는 나이가 든다. 나이 들며 가능성들을 하나둘 잃어버린다. 그러나 가능성을 지니는 자는 나 자신만이 아니다. 타인들, 단지 젊고 인생을 이제 시작하는 이들뿐 아니라 모든 타인은 저마다의 사연만큼이나 많은 가능성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있다.
이제 가능성은 타인의 가능성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기회를 얻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친지들에게, 젊은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가능성 자체로서 자신의 현재를 시험해보는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가능성이 아닌 타인의 가능성을 돌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인간은 수전노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마지막 동전처럼 움켜잡고 홀로 죽지 않는다. 타인이 누릴 미래를 자기의 미래처럼 돌보기에 인간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이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미래는 불멸의 고리를 만들며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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