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태어나면서부터 세계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기차가 철로의 이음새들을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 철도만의 음악 역시 있다. 그래서 기차는 인간의 역사를 기록한 예술이 될 수 있다.
또한 기차는 숨겨진 역사의 틈새들을 보여준다.
기차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 삶에 깊이 들어섰다. 비행기나 자동차의 실용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세기의 절대적 운송수단으로서 말이다.
반면 기차 여행은 쾌적하며, 그런 한에서 일단 상류 사회의 징표였다.
기차는 정념의 차원에서도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이 스며든다.
우리에겐 서정적인 교통수단인 기차가 근대에는 개인의 고유성을 말살하는 냉혹한 기계문명의 디스토피아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더욱 무시무시한 기계들을 얻게 되어, 기차 정도는 아주 인간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더 나아가 기차는 현대적인 ‘존재론’을 구현한다.
기차의 창문들 각각처럼 세계는 전체를 이루지 않는 파편들, 차이뿐이다. 전체성은 주인공이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옮겨갈 때 그 ‘횡단선’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횡단선을 따라 생기는 이 전체는 파편들을 통일하는 원리 같은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도, 법칙도 없으며 오로지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한때 피젯스피너의 인기는 대단했다. 처음 봤을 때 카프카가 묘사한 장난감이 탄생한 줄 알았다.
피젯스피너가 꼭 이렇다. 납작하며, 별 모양도 있고, 유난히 빨리 돈다. 피젯스피너도 저 오드라데크처럼 다른 목적이 있던 기계의 한 부속인지 별도의 사물인지 잘 판별이 안 된다. 한마디로 용도를 모른다.
이 물건의 용도에 대해 주의력 결핍 치료용이라는 옹호도 있다. ‘초조하게 꼼지락거리다’라는 뜻의 ‘피젯fidget’을 이름으로 가진 물건답게 불안감을 흡수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용도라고도 하며, 금연에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모두 확정적인 얘기는 아니다. ‘쓸모없다는 것’이 오히려 피젯스피너의 독창성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 반복은 무상하다. 행위가 뭔가를 성취한다면 반복이 있을 수 없고 행위는 종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무상한 반복을 좋아한다. 어느 휴양호텔에서는 밤이면 연못에 개구리 소리를 틀어놓는다. 개구리의 단순한 울음이 끝없이 반복되는데, 그 끝에 어떤 완성을 기다리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개구리 울음의 반복 자체를 그냥 좋아하고 만족을 얻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목적을 향한 전진이 아니라 무상한 삶, 무위의 삶을 희구한다. 사전은 무위를 ‘이룸이 없음’으로, 무상을 ‘행위에 대한 대가 없음’으로 정의한다. 목적을 설정해 이루려 하지 않고, 대가를 예측해 행위하지 않는 것이 무위, 무상의 삶이다. 한 기업 임원이 자신의 노동 이유는 은퇴 후 쉬는 삶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왜 목적을 향해 조직의 부속품처럼 노동하는가? 더 이상 목적에 종속된 수단처럼 되지 않고 쉬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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