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세주의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슬픔이 넘친다.

세상을 버리고 싶은 이들이 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해결할 수 없이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야만 하는 부정한 사랑에 빠진 트리스탄은 말한다.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노랫말이다.

염세주의를 생각하면서 근대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의 근본에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의지란 의도한 바를 행하는 자유의지 같은 것이 아니다. 의지라는 말은 쇼펜하우어에게서 맹목적인 충동을 가리킨다. 우리 삶은 이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는 노예 상태이다.

두 가지 비관적인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맹목적인 충동을 다 만족시켜주지 못해 삶은 늘 허기와도 같은 고통을 겪는다. 반대로 이 충동이 쉽게 충족되는 경우엔? 삶은 좌표를 읽고 무료함에 빠지게 된다.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권태와 무료함. 인생은 어디로 가든 이 두 가지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참된 행복, 즉 삶과 고뇌로부터의 구원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11 의지의 부정과 함께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 대양처럼 완전히 고요한 마음, 깊은 평정, 흔들림 없는 확신과 명랑함"12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처럼 염세주의를 인간의 타고난 충동이 겪는 결핍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엔 염세주의는 훨씬 심오하다. 염세주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관점, 삶을 긍정하는 자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통찰이다. 현실이란 삶을 긍정하기보다는 반대로, 가벼운 쾌락에 욕심내며 태만, 복수심과 시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남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삶을 긍정하는 자라면 삶을 파괴하는 이 현실 앞에서 염세의 눈에 눈물을 담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았던 저 예술가들의 슬픈 시와 음악이 그렇듯 말이다.

유머

유머는 타인과의 관계를 즐겁게 해준다. 대화가 다루는 주제의 무거움 때문에 생기는 상대자와의 경직된 관계를 풀어서, 쟁점에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준다. 그러니 유머는 축복이 아닌가?

유머는 이렇게 마비된 사회에 벌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머는 철학 속으로 파고든다.

유머의 위대함은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데만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 마음의 한 비밀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웃을 수는 없다. 누구도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자신이 성공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인생을 체념한 자만이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되뇌며 삶과 타협한다. 우리는 인생이 행복해서 웃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삶을 보라. 행복과 불행의 조각들이 설탕과 모래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 인생 자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요컨대 성공이나 행복 같은 이념이 우리를 웃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웃음을 만들기엔 너무 추상적이다.

지적인 세계에서는 오로지 삶의 축복처럼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유머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것은 액면가가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르나 손에 쥐고 무게와 촉감과 광채를 느껴볼 수 있는 진짜 금화이다. 지적인 세계 밖에서는? 아이들이나 강아지들이 우리를 웃게 할 것이다. 그들은 유머와 같은 자유를 보여주지만, 당연히 유머보다 위대하다.

사랑의말

세월은 계속 흐르니 아버지와 어머니께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드리고 싶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그간 연습이 없었던 까닭이다. 아이에게는 태어나 요람에 누웠을 때부터 일부러라도 사랑한다라는 말을 계속 한다. 안 쓰면 잊히고 마는 외국어처럼 언젠가 말문이 막혀버릴지 모르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한다와 같은 마음의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거 당연히 알 텐데 뭐하러 하나 하는 심정에서이다. 일상은 젖은 옷처럼 회색으로 처진 채 생기가 없는데, 그 일상에 한번 얹어보자니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화려해 어색하게 느껴져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말들은 생활 속에서 사용함으로써만 인공호흡으로 숨결을 얻듯 생명을 얻는다. 사랑의 말은 발화되지 않으면, 바람이 없을 때 죽는 바람개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잠잘 뿐이다.

기도나 주문의 말 역시 비슷하다. 기도는 언제 기도가 되는가? 기도문이 짧은 몇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한번 외우고 나면 기도는 끝인가? 왜 신앙을 가진 이는 기도문을 완벽히 한번 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늘 반복해서 기도하는가? 기도는 발화되는 그 순간에만 기도로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일회적 발화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발화가 이루어질 때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주문 역시 마찬가지다. 창과 칼이 무기고에 있다고 적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휘둘러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주문 역시 책에 적혀 있다고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가 발화하는 순간에만 현실이 된다.

사랑의 말도 말해지는 순간 비로소 현실이 된다. 현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로 말하는 사람을 구속하는 ‘법’으로서 효력을 지닌다는 뜻이다. 이 점은 맹세한다라는 말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맹세는 어떤 법의 문장에 근거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맹세한다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말하는 자를 구속하는 법인 것이다. 그러니 맹세의 말과 더불어 지상에 없던 유일무이한 법, 오로지 맹세의 말을 한 사람만 구속하는 새로운 법이 탄생하는 셈이다.

그러니 부모와 아이와 반려자에 대한 사랑은, 한 가정의 장롱 안에서 잠자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금덩어리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을 금덩어리로 믿고 보관해놓은 채 영영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 꺼내 보려 하면, 그것은 장롱의 나프탈렌처럼 다 녹아 사라지고 흔적도 보이지 않으리라. 오로지 입 위에 올려놓을 때만 사랑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사랑은 죽기 쉬운 생명체인 듯 끊임없이 발화를 통해 숨결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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