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이집트인들은 시간에 대해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네헤Ncheh‘, 즉 ‘수백만 년간‘이라고 불렀고 그것의 본질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과 같은 순환이었다. 해가 뜨고, 지고, 또 뜬다. 나일강은 범람하고, 물러났다가, 또다시 범람한다. 별들은 한자리에 선 관찰자의 주위를 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회전하며 거대한 시간의 바퀴 또한 망자들을 처분하고, 새로 태어난 이들을 성숙과 숙성을 겪게 해 죽음으로 안내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실제로 변하는 것은 없다. 이집트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물의 본질로 여겨졌고, 이런 사고방식은 사후 세계로까지 확장해 메트에 전시된 인물상들의 끝없는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나는 특히 그 여자 일꾼들을 보면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얼마나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을지, 매일 그 방망이를 돌리는 일상이 절대 끝나지 않고 다른 어떤 것도 종결되지 않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지를 마음 깊숙이 감각한다. 그 시대에 이미 고대의 것이 되어 있었고, 그 후로도 수천 년간 문화의 구심점이 될 피라미드가 버티고 있는데 진보하는 역사를 상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지.

이집트인들이 문명의 초기부터 이런 눈부신 것을 만든 이유가 신학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새감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완전한 것은 제트의 시간을 나눌 수 없다. 어떤 사물이 신성한 영역에 도달하려면 그것은 마치 신처럼 흠잡을데 없이 훌륭해야 했고, 그래서 이집트의 장인들은 그들의 예술을 발전시킴에 있어 절대로 노력을 아끼거나 수준을 타협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기묘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초자연적이고 불멸인 존재로까지 보이는 물건들을 확보하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5천 년이 지난 지금 그 물건들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군중을 보면 그들의 투자는 성공한 것 같다.

예술은 어느 주제에 관해 몇 가지 요점을 아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지는 세상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점이야말로 예술이 절대 내놓지 않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말로 단번에 요약하기에 너무 거대한 동시에 아주 내밀한 것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저녁 교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친 것을 느낀다. 남은 시간은 꿈결처럼 신전 앞에 서서 시선을 이것에 두었다가 저것에 두었다가 하면서 그저 흘러가게 두리라 생각한다. 명랑한 관람객 하나가 내게 지루한지 묻는다. 내가 특별히 지루해 보여서 물었다기보다는 종종 받는 질문이다. 딱히 그렇지 않다고 답하자 그녀는 "좋네요!"라고 말하고는 가버린다. 나는 지루해하는 법을 거의 잊어버렸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다. 스톡홀름 증후군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에 굴복한 것 같다. 나는 이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그것을 채울수도, 죽일 수도, 더 작은 조각들로 쪼갤 수도 없다.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일이 끝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 할 삶에 적응해버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7-04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04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