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하나의 작품은 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제아무리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 의 인간관계에 비해 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작품은 그것을 쓴 정신을 훨씬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평범한 사람이 쓴 작품일지라도 유익하고 읽을 가치가 있으며 재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정신의 결정체이자, 그 사람의 생각과 연구의 결과이자 결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위한 기분전환을 위해서는 옛 고전을 읽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작 반 시간에 불과할지라도 고전 작가의 한 작품을 읽으면 곧 생기를 느끼게 되고,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힘이 솟아나고, 기분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물을 마시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과도 같다.

두 가지의 역사, 즉 정치의 역사와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존재한다. 정치의 역사는 의지의 역사이고, 문학과 예술의 역사는 지성의 역사이다.
정치의 역사는 보통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의 역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안과 궁핍, 속임수와 끔찍한 살인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문학과 예술의 역사는 잘못된 길을 들어서서 헤매는 순간조차도 고독한 지성처럼 그 어느 부분이라도 모두 즐겁고 명랑하다.

한 인간의 위대함을 추정할 때 정신적인 위대함에는 물리적인 것과는 반대되는 법칙이 적용된다. 물리적인 크기는 멀리 있을수록 더 작아지지만, 정신적인 위대함은 멀어질수록 더 커진다.

유년기와 청년기는 자료들을 수집해서 그 각각의 특징들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근본적으로 알아나가는 시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판단은 미루어두고, 최종 설명도 뒤로 미루어야만 한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성숙한 경험이 필요하므로 판단력은 그대로 보호하면서, 그 판단력에 선입견이 침투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단력이 영원히 마비되어버리고 만다.

개는 충실함의 상징이다. 식물 중에는 전나무가 그러한 존재이다.
전나무만은 좋을 때뿐 아니라 나쁠 때도 우리와 함께 견딘다. 다른 나무들과 식물, 곤충, 새들은 다시 해가 빛날 때 되돌아오기 위해 우리 곁을 떠나지만 전나무만은 태양의 총애를 받으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의 공허함과 무료함에서 생겨나는 인간 사회에 대한 욕구는 인간을 한 덩어리가 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또 불쾌한 일과 참을 수 없는 결점으로 인해 서로 멀어진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그들은 서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존중과 예의다. 그리하여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에게 ‘거리를 지켜라(keep your distance)’고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서로 따뜻해지려는 교류의 욕망은 충족하면서도 가시에 찔리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내적인 따뜻함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통과 괴로움을 받지 않기 위해 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기를 좋아한다.

일반적인 인간에게 필요한 지식은 각 개인의 외적인 상황을 감안해 일반적인 교양의 정도에 따라서 과목을 편성하고, 필수적인 기본 과목에서부터 철학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목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단계적으로 구성해 그것을 기본과정이나 과목으로 세분화시키고 확장해야 한다. 특수한 직업이나 전문 분야의 지식은 그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에게 그 선택을 맡기는 것이 좋다.
이렇게 얻은 지식의 전체적인 모습은 지적 교육을 위해 특수하게 완성시킨 하나의 표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준도 10년마다 한 번씩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교육을 실시한다면 청년 시절에 가지는 기억의 힘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해 그 이후의 판단력에 아주 탁월한 재료가 될 것이다.

인식의 성숙은 각 개개인이 지닌 능력의 높고 낮음과 관계가 없고, 또 완전함의 정도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 그 완전성이라는 것은 추상적 인식과 직관적 인식의 연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두 인식의 깊이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지성의 본질에 따르면, 개념은 직관을 추상화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직관은 개념보다 더 앞서 존재한다. 그러나 단순히 교사와 책에 대한 자신의 경험만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실제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그는 어떤 개념이 직관에 해당하는 것이고 어떤 직관이 어느 개념에 속하는 것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가 이 두 가지를 정확하게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따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을 ‘아주 자연스러운 교육’이라 부른다.

교육자는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인식의 순서를 탐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에 그 순서에 따라 아이들에게 세계의 사물과 그 관계를 체계적으로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다른 잘못된 생각이 아이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한 번 잘못된 생각이 주입되고 나면 다시는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정확한 개념과 연결되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직관을 늘 개념보다 앞서는 것으로 해야 하며, 그것이 반대로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는 원본을 통해서만 인생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미리 사본으로 알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서둘러 손에 책을 쥐여주기보다는 사물과 인간관계에 대해 알려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현실 세계를 순수하게 파악하고 그곳에서 개념을 직접 이끌어낸 후에 그에 대한 근거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지혜는 그 색과 향기로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떨어지는 장미와도 같다. 가시가 없는 장미는 없지만, 장미가 없는 가시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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