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느끼는 우리의 감각은 영원한 것이지만 즐거움을 느끼는 우리의 감각은 좁은 한계에 갇혀 있다. 모든 각 개체의 불행은 예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불행은 예외가 아닌 규칙이다.
우리는 온몸이 건강한 상태는 느끼지 못하면서도 신발이 작아서 꼭 끼는 것 같은 작은 부위의 고통은 쉽게 느낀다. 그것처럼 우리는 완벽하게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하찮고 사소한 일만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자주 지적하듯이 고통은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지만 행복과 평안함은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재난을 소극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체계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재난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것이고,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이자 좋은 것이다. 즉 모든 행복한 것과 욕구의 충족은 소극적인 것, 그저 욕망의 단순한 충족이자 고통의 소멸인 것이다.
인생에서 많은 불행을 겪을 때 가장 효과적인 위로는 우리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여러 민족의 삶을 보여주지만 전쟁이나 반란 외에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 평화로운 시기는 짧은 휴식 시간이나 막간의 극으로 가끔 한 번 나타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빈곤과 무료함과의 투쟁일 뿐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적을 발견하고 끊임없는 투쟁 속에 살다가 손에 무기를 든 채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의 삶에서 궁핍, 고난, 고통, 노력의 좌절 같은 압력이 없다면 사람들의 오만함은 폭발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증가해 억제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광포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배가 안전하고 똑바로 나아가기 위해서 배에 싣는 밸러스트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항상 어느 정도의 걱정이나 고난, 고통이 필요하다.
일, 고난, 노력 그리고 고통은 대부분의 인간이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운명이다.
고통은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쾌락과 행복은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인생이 행복했는지는 그가 얼마나 기쁨과 즐거움을 즐겼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고통이 없었는가로 판단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잘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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