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명문장/어우동 사건
조선 성종 때는 유교 윤리가 확립돼가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양반댁 규수였던 어우동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여러 남성과 어울리고 심지어 관리나 유학자들과 문란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당시 심각한 사회적 풍파를 일으켰다. 유교 국가에서 부도덕의 상징이었던 어우동은 1980년대 성해방의 상징처럼 다루어지는 등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