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섬 전체로 번졌는데, 이 와중에 소작인회는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부수었고 문재철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주모자들에게 폭력 행사를 하고 맞고소하는 등혼란이 야기됐다. 이때 경찰은 서태석을 비롯한 소작인회 핵심 인물 13명을 구속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과감한 투쟁을 벌인다. ‘원정 농성‘
을 시작했는데 암태청년회, 암태소작회, 암태부인회의 남녀 400여 명이 범선 7척을 타고 목포로 건너가서 법원지청에서 석방을 요구하는 집단농성을 벌인 것이다.
이로 인해 암태도의 투쟁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고 평양에서 35원, 완도에서 20원등의 모금이 이루어지는 등 전국에서 성원이 밀려들기도 했다. 수차례 투쟁을 통해 결국 소작인회는 소작료 4할제를 끝내 관철시키면서 투쟁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