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어떤 순간에 그만두어야겠다는 확신을 얻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그만두지 않으려고 열심일까?
간신히 그만두기로 결정해 놓고서는 왜 죄책감을 느낄까?

이 책의 목표는 과학의 최전선에서 얻은 퀴팅 관련 최신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애당초 우리가 어쩌다가 ‘그릿’이라는 개념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탐구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만두지 않기로 정하더라도 그 결정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용기 있고 의미 있는 삶’의 요소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그릿은 미덕이고 퀴팅은 죄악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우리를 낚았을까?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끈기를 받들어야 할 덕목으로 꼽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최근 이에 반발하는 작은 움직임이 그렇게까지 화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쉴 새 없이 일했는데도 파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빈둥거리는데도 돈을 긁어모으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끈기를, 인과관계가 단순한 그 힘을 믿으려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그만두고 기존 운명을 다른 것으로 바꿀 때 삶은 긍정적인 쪽으로 달라질 수 있다.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면 제일 먼저 거쳐야 할 단계가 그만두는 것이다.(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지구의 미래를 지키려면 화석연료를 포기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신규 에너지 생산전략을 수용해야 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삶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원치 않는 곳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을 포함해 그렇게 갇혀버린 사람을 이미 몇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20년부터 누군가가 회사 신분증과 출입증을 반납하며 "잘 있어라, 머저리들아!"라고 즐겁게 외치는 것과 관련된 기사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보도되었다. 팬데믹 덕분이다. 대공황에 빗대어 ‘대퇴직’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퀴팅이 기삿거리가 되는 이유는, 그만두는 사람은 여전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대로다. 퀴팅을 바라보는 전반적인 태도는 예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퀴팅은 피해야 할 무언가다.

우리는 팟캐스트나 부모를 통해 그만두는 것은 성격이 나약하고 진취적이지 못하고 끝맺음을 못하는 증거라는 말을, 절대 성공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지금도 주기적으로 듣는다. ‘대안을 마련해 갈아탈 준비가 될 때까지는 직장을 그만두면 안 된다’라는 오랜 격언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퀴팅으로 얻는 이점과 퀴팅의 오명 사이의 괴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다. 개인적인 면에서든 집단적인 면에서든 퀴팅이 우리 마음과 정신에 상당한 공간을 차지하고, 우리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명하다.

퀴팅은 속으로는 옳지만 겉으로는 틀린 것처럼 보이고, 제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만둔다는 개념에서 느낀 불쾌함에는 유통기한도 없다.

퀴팅은 금단의 열매다.
퀴팅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기 자신과 아끼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그걸 얻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인 믿음에 도전장을 내민다.

퀴팅은 성공법에 관한 지배적인 견해에 어긋난다. 지배적인 견해에서는 퀴팅을 비뚤어진 일탈이자 일반적인 범주를 약간 벗어나는 비열한 짓으로 본다. 더 나은 무언가를 꿈꾸기 위해 ‘영혼을 갉아먹는 형편없는 일’을 버리는 것보다 그 일에 계속 붙어 있는 편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떠나는 순간 문을 절반도 벗어나기 전에 ‘그만둔 자’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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