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수용하는 데 가장 성공한 가족들은 타협하려는 의지를 서로 받아들인다. 불분명한 상실 문제에 대해 각자가 선호하는 해결책을 완고하게 고집하기보다는,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듣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들은 서로가 아니라 문제를 공격하기로 다짐한다.

우리는 완벽한 해결책이 없는 현재 상황 속에서 가능한 한 최선의 답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감수해야 하며,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변화에 대한 수정 과정은 절대로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복합적인 상실은 절망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서 변화의 힘마저 앗아 가지는 않는다.

그리스어로 ‘위기’는 ‘터닝 포인트’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두 단어는 모호한 상실을 안고 있다. 불확실한 상실로 인해 힘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는 극도로 좌절하게 되고, 그 후에는 갑작스럽게 혹은 천천히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재한 가족 구성원의 상태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다.

모호한 상실은 우리를 무능하게 만든다. 그런 감정은 우리의 주인 의식을 잠식하고 세상이 공정하고 질서 있고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을 파괴한다. 하지만 우리가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려면, 때로는 우리가 속한 세계가 모호성이 적은 때라고 할지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불확실한 상실을 접하게 되고 이에 대처하려면 완전한 해결에 대한 욕망을 먼저 누그러뜨려야 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관리’란 내면의 것(지각, 감정, 감정, 기억)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외부적인 것(다른 사람, 상황, 환경)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완전하게 부재하거나 존재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내부 변화는 종종 외부 장악과 연결된다.

해결되지 않은 슬픔을 다루는 심리상담사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은 피한다. 내가 문제에 대처하는 좋은 전략으로 여기는 요소들이 가족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가족 대화는 현재와 미래의 모호한 상실에 대처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족 대화를 그들의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나가기를 권장한다. 부모들이 나이가 들고 건강 상태가 바뀌면서, 누가 돌보고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또 규칙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가족 기념일과 축하 모임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 예외 없이 일어나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재구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데, 특히 모호한 상실이 가중된 스트레스 상황에서 중요하다.

예전에 보았던 러시아 영화가 떠오른다. 한 나이 든 여자가 전신이 마비된 채 병상에 누워 있는데, 그녀의 유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하나가 큰 종소리를 내는 끈에 묶여 있다. 이 환자는 비록 육체적으로 무능력하지만, 가족 전체의 운명을 손가락 하나로 지배하고 있다. 가족들은 그녀가 울리는 종소리의 포로였다. 가족들이 가족 내 만성 질환자와 함께 살려면 환자와 가족 ‘모두’ 영성과 통제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장기적인 모호함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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