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장’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모를 때부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배운다. 영장의 뜻을 대략 정리하면 ‘모든 피조물의 주인 노릇을 하며 다스리는 최고의 지위를 가진 존재’라는 의미다. 자부심이 잔뜩 부풀어 오르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을 두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게 과연 적절한 표현일까?
주인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구의 주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단지 여타 동식물에 대한 지배력뿐만 아니라, 지구를 잘 보살피는 데에 필요한 덕목도 갖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은 인류가 과연 지구라는 자연에 도움이 되었는지 회의를 품는다. 인간의 환경 파괴로 지구상의 생물종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화석연료 과용과 그에 따른 온난화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만 챙기며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에는 진지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오는 실정이다.
인간을 만물, 즉 자연계의 영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답은 부정에 가깝다. 인간을 두고 적절한 표현을 찾자면 ‘지배자’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배자는 주어진 집단에서 자신의 선호대로 다른 성원들을 멋대로 쥐락펴락하는 존재인데, 인간이 지구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개인에 속한 특징은 만물의 지배자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지닌 탁월한 개인적 특성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물리적인 힘에서 압도적인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인간을 만물의 지배자로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협동’ 능력이다. 불곰과 만나는 야생의 상황에서 인간은 서로 힘을 모아 불곰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불곰들은 그런 효율적인 결집력을 보이지 못했기에 결국 인간이 승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협동 능력에서 뒤처진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나 인간이 허락해준 특별한 공간을 찾아가야 했다.
다른 이유로 언어와 지능을 들 수 있다. 이것이 협동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지능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더 출중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방법을 알았고, 조직적이고 구문화된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기에 더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가 발달하는 데는 지능과 신체, 특히 구강의 구조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여러 요소가 연결되어 인간을 만물의 지배자로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지배자가 되는 과정에 협력이라는 요소가 엔진으로 작동했고, 지능, 언어, 신체 구조 등이 인류의 협동을 다른 종들의 협동에 비해 우월하게 만드는 윤활제로 작동했다. 협력이라는 메커니즘이 방향을 잡고, 그 물줄기에 지능과 언어가 가세함으로써 지배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인류가 대규모의 군집생활을 하도록 만든 핵심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농업혁명을 그 계기로 주장한다. 경작을 통해 음식 공급이 안정화되고 장기간의 수급이 예측 가능해지면서 수렵채집생활을 접고 정착해 대규모 집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2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물교환이 군집생활의 동기라고 주장한다. 소집단 사이의 잉여 물품과 부족 물품이 다르기에 서로 물건을 교환해야 했고, 이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는 데 농업혁명이 도움이 되었다는 의견이다. 즉 물물교환이 엔진으로 작동했고, 농업혁명은 윤활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족에서 시작하여 협력의 단위는 점차 커졌고, 정착생활을 통하여 그 규모가 획기적으로 확대되었다. 만물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는 그만큼 공고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간의 집단들은 서로 간에 경쟁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갈등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부의 결속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고,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칭송하는 이데올로기가 꾸준히 만들어진다.
국가가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이 확장되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면,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속한 국가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족을 중심으로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고, 어떤 도리를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가족 내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가족 내에서의 위치가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를 포함한 인간의 도리를 규정한다.
고대 도시국가는 확장된 가족 같은 정신적 결사체로 인식되었기에 가장 중요한 정신적 가치는 애국심이었다. 가족과 마찬가지로 도시국가에서 각 구성원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국가의 보존에 헌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이처럼 국가가 핵심 단위가 되면서 사적인 영역으로서의 가족은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축소된다.
가족의 가치와 국가의 가치가 충돌할 때는 국가가 우선적 위치를 차지하고, 가족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간주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소개된 사례는 이러한 경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을 맞이할 때 생존해 돌아온 병사의 가족은 애통한 표정을 지어야 했고, 사망한 병사의 가족은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국가주의적 애국심 앞에서 자연적 본능마저 통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성의 도래는 일반적 원리에 의해 현상과 행위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지적인 측면이 성장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의 능력으로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그뿐 아니다. 신화에서 신이 말하는 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신의 명령에 따라 행위하는 수동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에서 벗어났다. 이성을 통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적극적 관점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에는 서로 구분된 세 영역이 있어 이들이 각기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본능의 부분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성향을 돈과 이득을 사랑하는 ‘욕망’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명예를 사랑하는 부분으로 ‘기개’의 영역이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배고픈 것을 잊고 먼저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사회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분노와 같은 정서 역시 행동을 지배하는 것으로 영혼의 한 부분을 이룬다. 셋째는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으로 ‘이성’의 영역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할 때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를 궁리한다. 플라톤은 이론적·실천적 영역 모두에 있어 지적인 탐구를 하는 것을 이성의 영역으로 이해했다.
개인 영혼의 차원에서 보는 좋은 삶을 위해서든, 사회적 차원의 조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든 플라톤은 ‘질서kosmos’와 ‘조화’를 중심에 놓는다.18 그는 영혼 차원의 좋은 삶은 충돌할 수 있는 세 영역 사이의 질서와 조화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세 영역이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고 충돌하는 영혼은 지리멸렬한 상태에 머물러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는 각 계급이 자기 본분의 영역을 담당하며 남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 이성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지배자 계급의 지휘 아래 생산자 계급은 공동체에 필요 물품을 생산해 공급하고, 군사 계급은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들의 본분을 지키며 수행하는 사회가 플라톤이 그리는 이상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삶의 운영에 있어 이성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는 플라톤이 세운 당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을 수학, 천문학, 철학, 수사학 등을 배우고 연구하며 지낸 명실상부한 플라톤의 제자다.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사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능을 수행할 때 가장 그것답다. 인간도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때 인간답다.19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발휘해야 인간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의 세계는 식물, 동물, 인간으로 이어진다. 식물은 환경에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동물은 여기에 더해 주변을 지각하고 몸을 움직여 활동하며 활발히 번식하는 기능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말은 사람들과 어울려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그 속에서 자기 이해를 도모하는 행위를 한다는 현대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여기서 ‘정치적’이라고 번역된 단어 ‘politikos(πολιτικ??)’는 ‘polis(π?λι?, 도시국가)에 속한다’는 의미다. 개인이 도시국가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도시국가를 구성하는 애국심, 정직, 용맹, 우정, 공감 등의 덕목들을 갖추지 않고서는 인간다울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대 그리스 사회를 지배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이념으로 유기체론적인 사회관과 이성주의를 살펴보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 내에서의 신분이 개인의 삶과 도리를 결정한다는 것이 바로 유기체론적인 세계관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공동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개인의 윤리를 결정하는 도리와 덕도 공동체의 화합과 안정에 기여하는지 여부에 달렸다.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성찰이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탐구했으며, 이 태도가 플라톤을 비롯한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런 이유로 후세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좋은 삶은 성찰을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계승한다. 그리고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 그들 철학에 면면히 이어진다.
모든 사람이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해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 사회를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 개인의 의무이며 이런 의무를 다할 때 개인은 행복하다. 이런 공동체 중심주의적 생각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대한 향수를 배경으로 발전했다.
성과 속의 계급 사회는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투었다. 기독교가 제시한 평등은 현실세계가 아닌 여호와의 세계, 다시 말해 피안의 세계에서나 얻을 수 있는 이상으로 통용된 셈이다. 고대 사회에 길들여진 계급적 사고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에 깊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에 의해 심어진 평등의식이 현실세계에서 실현되려면 사회 환경이 변화될 필요가 있었다. 또 평등한 개인의 존엄에 대한 의식이 더욱 숙성되어야 했다. 그러나 의식이 숙성되려면 씨앗이 필요하고, 이 씨앗이 기독교에 의해 뿌려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신 앞에서 모든 개인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의식이 씨앗으로 뿌려지고, 이 씨앗이 인고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숙성된다.
혼란의 시대를 겪으며 사람들의 성향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압도적으로 혼란스러운 환경에 노출되면서 환란을 극복하기보다는 환란 상황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번민하지 않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인간의 내면세계, 즉 감정의 영역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각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는 그 사람의 사적인 영역이다.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란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내밀한 영역을 일컫는다. 이 영역은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 속한 소우주micro-cosmos다. 여기서 개인은 자신의 꿈을 꾸고 미래를 구상할 수 있다. 이 영역에 눈을 뜨는 것은 개인이 단지 공동체의 부품이 아니라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평등사상 역시 존엄한 개인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조건이다. 계급과 신분에 따른 자연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는 존엄한 개인은 존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성의 사회구조상 유리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위해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의 기본권이 훼손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중세를 거치며 평등의 정신은 확장되고,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은 점차 깊어진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기획하고 성취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권리에 한해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성장해간다. 이런 생각들이 성장하며 공고해지는 과정이 바로 개인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개인에 대한 이런 생각이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생각, 즉 다른 이들도 나처럼 자율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권리가 있으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형성하게 된다.
평등과 내면세계에 대한 의식도 비슷하다.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평등의 메시지를 던졌다. 물론 평등과 사랑의 메시지가 사회 안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등의 메시지가 현실을 자극하며 이념과 현실 사이에 지속적인 긴장을 촉발한 것만은 분명하다. 아울러 중세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점차 개인의 내면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나의 사적인 영역, 내가 주인이 되어 이끌어가야 할 영역에 대한 깨달음이 새로 싹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런 의식들이 현실 속에서 구현될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 했다.
근대를 여는 과정에 르네상스가 한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씨앗 없이는 꽃이 필 수 없지만, 모든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꽃을 피우려면 적절한 환경 속에서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중세에 뿌려진 개인의 씨앗이 근대에 들어와 건강한 싹을 틔우고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적절한 환경과 양분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적 특성상 이탈리아는 동방의 물물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상업이 더욱 발전했고 부가 축적될 수 있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면서 중소 상공업자들이 힘을 갖게 된다. 이들은 기존의 권위주의 시대에 귀족과 종교 지도자들이 독점하던 가치관의 통제에서 풀려나 분방함을 즐기기 시작한다. 종교적 서사와 종교적 성찰이 주를 이루던 문학 영역에도 변화가 일며 연애 소설이 쏟아져 나온다. 미술과 음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점차 확대된다. 시와 소설 등 문학을 비롯해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예술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삶에 밀착해 파고든다. ‘르네상스’는 문자 그대로는 ‘부흥’을 의미하는데 우리에게는 ‘문예’가 붙어 ‘문예부흥’으로 번역되어 알려졌다. 아마도 르네상스 시기에 문학과 예술이 전례 없이 확대된 것에 주목한 결과로 보인다.
내적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예술을 발전시켰다는 의미 이상이다. 욕망과 정서가 머무는 내부에 대해 자유롭게 쓰고, 묘사하고, 이야기하면서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내 정신의 영역은 다른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영역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고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부르는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흔히 인간애, 인류애를 연상하지만 여기서 휴머니즘은 ‘인간다움’ 또는 ‘인간다움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고대 로마의 키케로가 사람이 지닌 ‘인간다움’을 의미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개념이 그 원류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에 대한 진리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경험적 관찰도 필요하고 수학과 같은 이성적 직관도 필요하다. 베이컨이 경험을 강조한 반면 데카르트는 이성을 강조했으며, 이들의 사상은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시대정신이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전통적 고정관념에서 해방시킨다. 그리고 개인에서 출발해 재구성하려 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미래를 새로 구성해나가기 위해 의지할 것은 다시 이성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적 세계관을 대체하면서 철학이 생겨날 때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 잡은 바로 그 이성 말이다. 인간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이 이성이다. 나의 경험, 지각, 판단 등이 참을 향한 올바른 이정표인가를 되돌아보면서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려나갈 능력, 이러한 능력이 이성이다.
이성은 과학을 통해 세상의 참된 모습을 밝혀줄 뿐 아니라, 올바른 삶의 방향을 인도해줄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이성적으로 탐구하면 결국 개인들이 모여 조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어떤 정치 체제가 이상적인가에 대한 토론이 다른 어떤 시대보다 더 활발하게 펼쳐졌다.
내면세계가 주목받고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하면서 감정의 영역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흔히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마음을 겸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별해 옳음을 추구하는 이성을 지닌 동시에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상황에 주관적·정서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이처럼 희로애락을 주관하는 정서라는 영역이 새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삶을 나락으로 이끄는 것,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홀대받아온 감정과 정서의 영역이 다시 새롭게 평가받는다.
공감과 연민이 윤리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이미 받아들인 사안이다. 진화론은 이 감정들이 생물학적 기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주었다. 진화론이 던지는 시사점이 있다면 거기까지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생물학이 윤리학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비약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추론이다. 공감과 연민이 생물학적인 연원을 갖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감정들이 윤리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종의 보존이라는 생물학적 울타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고차적 자아가 제약 없이 활동해 나의 삶을 지배할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
진리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적극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유 이외에도 많은 다른 사회적 가치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유롭게 경쟁하되 그 경쟁이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을 시작해서는 안 되며, 경쟁 과정에서 편파적인 판정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한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모래알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살기를 원한다. 평등, 정의, 사회적 연대 같은 가치들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가 이러한 열망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들 적극적인 가치들까지도 함께 구현하는 풍성한 사회가 되기를 열망한다. 이런 열망이 있기에 미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처방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주장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울림을 주고 있다.
인간의 존엄을 위한 초석은 모든 이들이 자유주의적 기본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권리를 서로 인정해주는 데 인간다움의 최소한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연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파시즘이 된다. 인민 해방의 이름으로 기본권을 제약하면 전체주의가 된다. 다수결의 이름으로 제약하면 대중 민주주의 독재가 된다.79 이념의 이름으로 신념, 의사 표현, 신체 이동과 같은 기본적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체제가 있다면, 이는 폭정이고 압제고 독재다. 그 체제 앞에 붙는 수식어만 달라질 뿐 애써 넘어선 권위주의로 회귀한다는 결론은 같다.
의학과 생명과학은 이미 인간의 노화와 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재산이 의료 혜택 및 질병 치료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면서 건강과 기대수명이 재산에 비례해 늘어난다는 것이 도처에서 보고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고 있으며, 핸드폰을 통해 내 손 안에서 누구와든 연결될 수 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엄청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수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 자동번역기가 발달하면서 이질적인 문화와 전통에 속한 사람들과도 소통이 가능하다. 이처럼 폭넓고 다양한 소통을 통해 다른 사회와 문화, 전통을 수용하고 그 차이를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되고 있다. 사람들의 포용력이 더 깊어져 결국 사회적 연대가 강화된다는 이야기다.86
결국 중요한 것은 타인도 나만큼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가치 이성의 기본 체력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 이성이 튼튼한 근력을 갖추고 있다면, 긍정적 연대가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의 압도적 위세에 눌려 이성이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주요 수단이 된다면, 이는 결국 이익집단의 연대를 조장하고 사회 갈등을 악화시키는 장치로 사용될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온기 있는 사회를 위한 긍정적 연대를 지향하는 가치 의식이 먼저 강화되어야 한다. 19세기에 포화를 받아 약해져 있던 이성은 4차 산업혁명 시대 또 다른 도전을 받고 있음을 보았다. 치열한 경쟁과 도구적 이성의 압도적 위세 속에 가치 이성이 쇠약해지는 모양새다. 이제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다른 두 요소인 공감과 자유로 눈길을 돌려보자. 공감은 가치 이성에 동력을 제공하는 연료다. 공감 능력 덕분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시작되고, 여기에 이성이 참여해 보편적 규범을 만든다. 이 규범이 외적인 권위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개인의 자율적 의지에 따라 구성될 때 진정한 인간다움이 성립한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공감에서 출발해 자율을 통해 타인도 나와 같은 희로애락의 정서를 갖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나갈 때 비로소 인간다움이 갖춰진다.
공감은 도덕의 출발을 가능케 만든 인간의 중요한 자산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공감이라는 감정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공감이 함께 사는 이웃들과의 공존과 배려에 양분을 제공한다면, 질투와 정복욕 같은 감정들은 공격성에 양분을 제공한다.
인터넷을 통해 의사소통이 확대되는 것이 사회적·정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해도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공감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인터넷 소통은 같은 사회적·경제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엮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소통은 개인들이 서로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소속감을 증진시킨다.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유함으로써 정서적 고립감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들의 공감 능력에 도움이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공감은 상대방에게 감정이입해 그의 어려움을 더불어 염려하는 타자 지향적인 정서다. 만약 인터넷이 엮어내는 사회적 서클이 현실적 이해관계를 도모하기 위한 ‘나’ 중심의 연대라면, 이러한 사회적 참여의 증가가 오히려 타자 지향적인 공감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확대로 소통의 양과 범위가 넓어졌는데 왜 공감은 후퇴할까? 전통적 소통은 대면적인 반면, 이들의 소통은 비대면적이고 문자화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면적 관계에서의 언어적 소통은 음성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음성에는 문자로 표현되는 인지적 정보 이외에 수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목소리의 떨림, 톤, 옥타브 등이 함께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며 표정과 동작을 사용해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워왔고,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을 숙달해왔다. 그래서 앞에 있는 사람이 농담을 하는 건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쉽사리 파악한다. 그러나 온라인이 소통의 중심이 되면서 대면적이고 구두적인 의사소통의 양은 대폭 줄고, 문자를 통한 텍스팅 형태의 의사소통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환경이 일반화되면서 동작과 표정은 물론, 음성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은 점차 쇠퇴하고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감정이입 능력이 떨어짐을 의미하고, 이는 공감 능력 저하로 이어진다.103 온라인 소통은 상대방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를 읽어내는 훈련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면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는 능력이 약화된다. 이는 상대방과 공감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타인들과 조율하는 능력 역시 떨어뜨리게 된다.
많은 사람이 사이버불링의 원인을 인터넷이 갖고 있는 익명성에서 찾는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성을 갖고 있는데, 이 공격성이 익명성 뒤에 숨어 공공연히 표출된다는 것이 그 설명이다. 분명 이러한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105 말하자면 이런 논리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둔감하다. 즉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그 결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가혹한 말이나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인간관계는 더욱 비대면화할 것이다. 이것은 공감 능력 저하를 가속화하고, 그에 상응해 온라인상의 폭력적 성향도 증가할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생존에 매몰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사는 사람다운 모습은 지속적인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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