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은 쾌락과 고통의 덧셈 뺄셈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감각적인 차원만을 기준으로 삼아 반려견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이란 말은 익숙한 표현이다. 그러나 생각의 조각들이 그렇듯이 친숙한 낱말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순간, 친숙함이 사라지고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주저 없이 행복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가’를 묻는 순간 그토록 친숙했던 행복의 의미가 알쏭달쏭해진다. 사랑이 그렇고, 아름다움이 그렇고, 성실함이 그렇다. 인간다움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그 뜻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느끼며 사용하다가도, 막상 그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려면 갑자기 모호해진다.

인간다움은 재능과 지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짐승이 아닌 인간이게 하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동물들이 갖고 있지 않은 어떤 탁월한 능력 때문에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서 찾을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 능력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능력, 불을 사용하는 능력, 과학 법칙을 탐구하는 능력, 음악과 미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능력, 종교를 통해 영원성을 추구하는 능력 등 인간이 지닌 탁월한 능력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들이 인간을 우수하게 만들어줄지는 모르지만 사람답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언어를 멋들어지게 구사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경탄할지는 몰라도, 그가 더 인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혼을 감동시키는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 예술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동물들이 그런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며, 그런 탁월한 능력에 기대 인간임에 자긍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음악적 표현이나 미술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인간답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다움은 재능과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재능과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아는 것이 많아서, 또는 아는 것을 잘 활용하기 때문에 인간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과 재능을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다움이 발현되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으면 비인간적이 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그리는 주인이다

타인도 나처럼 희로애락의 정서를 갖고 행복을 원하며 자기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런 존중의 태도는 인간다움의 중심을 이루며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준다

자신의 상태에 갇히지 않고 상대방의 상태에 나를 투영해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능력. 이것이 있기에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회적 동물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능력의 정도가 사람의 사회성을 결정한다. 이 능력이 많이 부족해 상대방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병증이 자폐다.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는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방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때 사이코패스가 된다.

역지사지를 함으로써 타인의 관점을 취하는 능력과 관련된 마음 상태에는 감정이입empathy, 연민compassion, 공감sympathy 등이 있다. 이들은 서로 혼동되어 쓰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안점에 차이가 있다.

공감은 나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공감이 타인을 배려하는 인간다움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에 도달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 왜 그럴까? 다른 이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들에게 가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또 내가 괴롭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혹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이기적 행동의 연장선상에 서게 된다. 즉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나의 편안함이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공감은 도덕적 감정을 만들어 윤리적 판단을 하는 출발점 역할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형성된 판단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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