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선물 같은 사람들이 다가왔지만, 꽤 많은 순간 저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떠나보냈습니다. 머리로는 나의 성장 배경을 디딤돌로 삼으리라 결심했지만, 사람들이 면도날 같은 말과 태도로 마음을 휙휙 그어놓을 때마다 저는 허우적거렸습니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데, 하나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더 큰 다른 상처가 덧입혀졌습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습니다. 어서 어른이 되고도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집을 떠나고 싶었고, 도망치듯 들어간 수도원조차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또다른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내 몸 둘 곳 하나 마련하기 힘든 세상에서 나는 내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내 몸을 둘 물리적 공간을 당장 마련하기는 힘들어도 내 마음 둘 곳을 마련하기는 그나마 좀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 둘 곳은 오직 시간뿐이었으니까요. 시간은 내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어떤 아픈 기억들을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희석시켜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시간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또다른 결심을 했습니다. 타인이 내게 주는 상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상처로 인해 툭툭 튀어나오는 나의 모난 태도와 못난 말들을 스스로 용납하진 말자고요. 나의 힘겨움을 핑계로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는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물론 타인이 나의 상처를 건드린 적도 있지만 그만큼 나도 그들의 감정선을 건드려 메아리처럼 돌아온 상처도 많았습니다. 내 상처를 더 후벼파지 않기 위해서, 나의 생존을 위해서 ‘쟤 왜 저래?’ ‘저 사람 나한테 왜 그래?’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무수한 타인들에게 거칠게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극단적으로 미워했던 타인들은 가난한 내 영혼의 반영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정해진 시간을 다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자기만의 유일한 한 획을 긋는 셈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품고서 각자의 긴 터널을 빠져나올 때 우리는 각자의 길 위에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곁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운명은 바뀔 수 없다.

Mutari fata non possunt.
무타리 파타 논 포쑨트.

매번 같은 인과관계를 찾거나 비슷한 지점에서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다면 삶은 얼마나 지루한 연극에 불과할까요? 생은 끊임없이 새로운 배역과 역할을 요구하는데 계속해서 과거 어느 시점을 탓하며, 나는 부득이하게 그것을 할 수 없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건 궁색하지 않을까요? 역으로 인간은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는 그 나약함과 결점으로 인해 수많은 아름다운 배역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운명은 정말 바꿀 수 없는 것일까요?

‘바람이란 멈출 때 끝난다’는 스토아 철학의 사고가 드러나는 문장입니다. 자연에서 부는 바람도, 인간 내면의 바람도 모두 스스로 멈출 때 끝납니다.
우리의 바람엔 다양한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적 바람과 나이들어가는 시점의 바람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 세네카의 생각입니다. 저는 나이들수록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와 바람을 품게 됩니다.

자식의 부족함을 마주하면서도 부모는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말해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체념의 마음도 있겠지만, 이 말을 했을 때 자식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뒤따릅니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 그때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누군가 내게 일러주었더라면, 나이들어 치러야만 했던 혹독한 어려움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누가 무슨 귀띔을 해준다 해도 넘어설 수 없는 삶의 구렁. 모두의 삶에는 구렁이 있습니다. 다만 그 오랜 구렁을 인지하고 응시하며 넘어서려는 사람과, 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뉠 뿐입니다.

아픔이 스토리가 되게.

Vexatio storia fiat.
벡사티오 스토리아 피아트.

인생에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자신에게 찾아온 아픔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인생에 아픔이 이유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의 아픔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이유,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 보다 발전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이유로 남겨두지 마세요. 아픔을 보호막으로 쓰지 마세요. 그러면 나를 보호한다고 뒤집어쓴 그 아픔이 실제로 내 앞길에 장애물이 되어 삶의 고통을 가중시킵니다.

아픔이 스토리가 되게 하려면 시간과 견딤이 필요합니다. 아픔이 고여 썩고 무르면 사람을 망치지만, 아픔이 숙성되어 스토리가 되면 한 사람의 생을 증언하는 역사가 됩니다.

아파도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Aegroto dum anima est,
애그로토 둠 아니마 에스트,
spes esse dicitur.
스페스 에쎄 디치투르.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대충 살며 쉬운 선택을 하고 싶은 욕망에 빠집니다. 그런 순간들마다 저는 스스로에게 일러둡니다. 그래도 너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 있고, 살아가려 한다고. 아무리 아파도 살아 있는 동안 희망은 있다고.

모든 고통은 시간에 의해
가벼워지고 옅어질 것입니다.

Omnes dolores tempore
옴네스 돌로레스 템포레
lenientur et mitigabuntur.
레니엔투르 에트 미티가분투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 저는 밤에 아무도 없는 산에 올라가 절규하듯 "하느님, 이 세상에 저를 내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지요!"라고 외쳤던 적이 참 많습니다. 나이든 지금도 침묵 속에서 남몰래 외치고 있지요.
그래도 이런 가운데 저를 위로해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저는 시간의 의미를 깨닫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가혹한 고통도 결국엔 시간이 데려갑니다. 시간 속에서 우리의 고통은 가벼워지고 옅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Nolite ergo solliciti esse in crastinum;
놀리테 에르고 솔리치티 에쎄 인 크라스티눔;
crastinus enim dies sollicitus erit
크라스티누스 에님 디에스 솔리치투스 에리트
sibi ipsi: sufficit diei malitia sua.
시비 입시: 수피치트 디에이 말리티아 수아.

희망을 가질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절망할 것도 없다.

Qui nil potest sperare,
퀴 닐 포테스트 스페라레,
desperet nihil.
데스페레트 니힐.

문장의 뒷부분에 방점을 두면 절망은 이 사람에게 없는 것입니다. 절망이 없기에 다시 희망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희망이 없어서 절망할 권리마저도 빼앗겼다면 차라리 다시 희망을 선택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한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갈 방향을 인지하는 것이 희망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기도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곧 한 사람을 향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자책과 탄식 속에 진보와 성장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자책은 스스로를 더 작고 보잘것없고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가장 비참한 날에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지는 내가 스스로의 위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내 아픔과 비참으로 타자를 이해하고 헤아리는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로와 도움을 갈구하는 고통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외로움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Semper dolor aderit in eo qui
셈페르 돌로르 아데리트 인 에오 퀴
solacio indiget et auxilio.
솔라치오 인디제트 에트 아욱실리오.
Semper aderit solitudo.
셈페르 아데리트 솔리투도.

인간은 난생처음 나 홀로 겪는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신음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내면에서 평생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내 편을 만들려 하고,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나 환경이 없으면 그것을 외로움, 또는 소외라 여깁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쉽사리 내 손 놓지 않을 편 하나 만들려고 그토록 몸부림치고 이해를 갈구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인간, 다른 인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존재.
처음 살아가는 인간이 처음 살게 될 인간에게 손 내밀고 그 손 꼭 붙들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편은 누구입니까?
아니 그 전에 당신은 살아가면서 몇 사람의 편이 되어주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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