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평야 | 내포땅의 풍요로움을 남김없이 느낄 수 있는 이 평화로운 길은 평범한 것의 아름다움을 되새기게 해준다.

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길은 찻길이 항시 언덕을 올라타고 높은 곳으로 나 있기 때문에 넓게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원한 조망을 제공한다.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란 흔히 강을 따라 난 길, 구절양장으로 기어오르는 고갯길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면서 평범한 들판길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여기다.

1959년 4월, 오랫동안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오늘날의 국립부여박물관장)을 지낸 금세기의 마지막 백제인 연재(然齋) 홍사준(洪思俊,1905~1980) 선생이 보원사터로 유물 조사 온 길에 마애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홍사준 선생은 이를 즉각 국보고적보존위원회(오늘날의 문화재위원회)의 이홍직(李弘稙), 김상기(金庠基) 교수에게 보고하였으며 위원회에서는 그해 5월 26일 당시 국립박물관(오늘날의 국립중앙박물관)의 관장 김재원(金載元) 박사와 황수영(黃壽永) 교수에게 현장조사를 의뢰하였고 조사단은 이 마애불이 백제시대의 뛰어난 불상인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 불상을 서산 마애불 또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산 마애불의 발견 아닌 발견은 실로 위대했다. 서산 마애불의 등장으로 우리는 비로소 백제 불상의 진면목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서산 마애불 등장 이전에 백제 불상에 대하여 말한 것은 모두 추론에 불과했다.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일본 광륭사(廣隆寺,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 일본 법륭사(法隆寺,호류지)의 백제관음 등은 그것이 백제계 불상일 것이라는 심증 속에서 논의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서산 마애불은 이런 심증을 확실한 물증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산 마애불은 미술사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자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하나는 삼존불 형식이면서도 여래입상 양옆의 곁보살〔?侍菩薩〕이 독특하게 배치된 점이며, 또 하나는 저 신비한 미소의 표현이다.

서산 마애불의 옛 모습 | 용현계곡 한쪽 벼랑에 새겨진 마애불의 옛 모습. 한때 보호각이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보호각을 걷어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1959년 11월 이경모 촬영)

가장 백제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 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서산 마애불 전경| 은행알 같은 눈으로 활짝 웃고 있는 여래의 모습은 ‘백제의 미소’라는 찬사를 자아내게 한다.

서산 마애불은 한동안 보호각 속에 고이 보존되어왔지만, 발견 당시의 상황을 보면 주변의 자연경관과 흔연히 어울리면서 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산 마애불은 과학적 계산을 고려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구사한 작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계적 계산을 넘어 진짜 과학적 배려에서 위치와 방향을 설정한 결과다.
서산 마애불이 향하고 있는 방위는 동동남 30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그것은 한 해의 시작을 의미하며, 일조량을 가장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이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과 같다.
마애불 정면에는 가리개를 펴듯 산자락이 둘러쳐져 있다. 이는 바람이 정면으로 마애불을 때리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애불이 새겨진 벼랑 위로는 마치 모자의 차양처럼 앞으로 불쑥 내민 큰 바위가 처마 역할을 하고 있어서 빗방울이 곧장 마애불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마침 마애불이 새겨진 면석 자체가 아래쪽으로 80도의 기울기를 갖고 있어서 더욱 효과적으로 빗방울을 피할 수 있다. 한마디로 광선을 최대한 받아들이면서 비바람을 직방으로 맞는 일이 없는 위치에 새긴 것이다.

서산 마애불의 경우 바위의 조건이 왼쪽은 높고 오른쪽은 낮다. 그래서 가운데 여래상의 조각을 보면 오른쪽 어깨가 바위에 얕게 붙어 있는데 왼쪽 어깨는 바위면에서 높이 솟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로 인해 보는 사람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서산 마애불이 기법상으로 가장 절묘하게 구사된 점은 뭐니뭐니 해도 야외 조각의 특성에 맞춰 얼굴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하고 몸체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차츰 낮은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점은 실로 놀랍다.
서산 마애불은 이처럼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제작되었으면서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제작된 결과인 듯한 편안한 인상을 준다. 바로 소리 없는 공력과 드러내지 않는 기교의 미덕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점은 실로 귀하다.

"이 마애불의 미소는 아침저녁으로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침에 보이는 미소는 밝은 가운데 평화로운 미소고, 저녁에 보이는 미소는 은은한 가운데 자비로운 미소입니다. 계절 중으로는 가을날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어느 시인은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라고 읊었지만 강냉이술이 붉어질 때 마애불의 미소는 더욱 신비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가을해가 서산을 넘어간 어둔 녘에 보이는 잔잔한 모습입니다."

성원할아버지 | 30여년 마애불과 함께해온 성원 할아버지가 삿갓등으로 마애불의 미소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광선의 방향에 따라 미소가 달라진다.

성원 할아버지는 마애불이 바라보는 앞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산신각을 모셔놓았다. 언젠가 내가 물으니 산이 좋아서 신령님께 감사하는 뜻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보원사터 |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서산 마애불과 연관된 백제의 고찰로 생각되며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지는 많은 석조 유물들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 오층석탑, 승탑과 비가 작은 내를 사이에 두고 줄지어 있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감은사탑 같은 중후한 안정감과 정림사탑 같은 경쾌한 상승감이 동시에 살아난 명품이다. 기단부 위층에 새겨진 팔부중상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릴리프(relief,돋을새김 조각)로서 손색이 없고 기단부 아래층에 새겨진 제각기 다른 동작의 열두 마리 사자상은 큰 볼거리다. 아래위로 튼실하게 짜여진 기단부 위의 오층 몸돌은 정림사탑에서 보여준 정연한 체감률도 일품이지만 마치 쟁반으로 떠받치듯,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듯 넓적한 굄돌을 하나 설정한 것이 이 탑의 유연한 멋을 자아내는 요체가 되었다.

보원사터 오층석탑 |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의 백제 전통과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의 기단 형식이 결합된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이 빼어나다.

나는 보원사터를 유난히 좋아했다. 폐사지인데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 좋았고 전국의 어느 답사지보다도 여기처럼 산천의 자연과 농촌의 사계절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더욱 좋아했다.

보원사터 출토 철제여래좌상| 완벽한 몸매의 균형과 유연한 옷주름의 표현이 돋보이는 이 불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불로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8세기 설과 10세기 설로 나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을 수입해서 우리의 삶이 고양된다면 얼마든지 수입해서 쓰는 겁니다. 그것은 주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 포용력의 개방성이라고 해야 해요. 불교미술은 결코 이교도들의 신앙물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방식의 정직한 표정이고 사상의 산물이지요. 보십시오. 서양 중세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고 기독교 건축과 조각이 발달했지요. 그런데 오늘날 어느 누구도 유럽의 중세 문화를 이스라엘의 아류라고 하지 않아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갖다 쓰는 것이지요. 다만 맹목적 모방이었냐, 주체적 수용을 통한 재창조였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백제의 미학은 그래서 빛나는 겁니다. 그들이 우리 고대국가의 세련된 고전미를 창출해냈거든요. 인도·중국·일본에선 볼 수 없는 화강암의 건축과 조각, 즉 석탑과 석불이 그 대표적 예인데 우리는 그중 석불의 아름다움을 답사한 것입니다. 저 잔잔한 ‘백제의 미소’에는 그런 뜻이 서려 있는 겁니다.

서산 마애불의 보호각은 통풍의 문제로 더 이상 둘 수 없어 2007년에 철거되었고, 성원 할아버지는 정년 뒤 몇해 더 근무하다 결국 자리를 떠나게 되었으며,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외지에서 들어가는 길이 아주 쉬워졌다.

비바람 속에 깨지고 마모되긴 했어도 그 남은 자취가 하나같이 명물이어서 일찍부터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통일신라 때 만든 당간지주건 고려시대 때 만든 석탑과 물확이건 유물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멋스러움에 백제의 숨결이 느껴진다. 미술사가들은 그것이 백제 지역에 나타난 지방적 특성이라며 주목하고 있다.

서산 마애불에 보호각이 준공된 때는 1965년 8월 10일인데 그때부터 오늘(1996)에 이르기까지 30년도 넘게 마애불의 관리인으로 근무하고 계신 분이 있다. 이름은 정장옥(鄭張玉), 수계한 법명은 성원(性圓)인데 스님은 아니고 속인으로서 한평생을 이 마애불과 함께해왔다. 성원 아저씨는 작년(1995)에 환갑이었다고 하니 30세 때부터 여기를 지키고 계신 것이다.
성원 아저씨는 작은 키에 언행이 조신하고 느려서 옆에 있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분이다. 그러나 이 마애불에 대한 존경과 자랑, 믿음과 사랑은 그 누구도 당할 수 없어서 어떤 답사객이 오고 참배객이 오든 해설을 부탁하면 수줍어 하면서도 사양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성원 아저씨는 마애불의 미소가 보호각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암막을 설치하고는 긴 장대에 백열등을 달아 태양의 방향에 따라 비추면서 미소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를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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