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구멍


쥐구멍은 나의 집
내 가난의 집
돈을 찾아서
한평생 쫓기며 도망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가 편히 쉴 수 있는
내 눈물의 고요한 방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한권의 책과
한잔의 커피가 놓여 있는
내 피안(彼岸)의 방
막 새끼를 낳은
어미 쥐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를 어루만져주시듯
쥐구멍으로 햇살이 들어와
아기 쥐의 몸을 어루만져주신다
따스하다
이제 억울한 일은 없다
내가 나를 속이지도 않는다
쥐구멍은 나만의 방
내 자유의 집

짜장면의 힘


짜장면은 힘이 있다
아버지의 힘이다
짜장면은 장딴지에 꿈틀대던 아버지의 젊은 핏줄이다
핏줄의 힘이다

나는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젊어진다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짜장면을 먹고 길을 달린다
아버지가 짜장면을 사주실 때마다 힘차게 더 빨리 달린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짜장면의 힘에 대해 슬퍼해보았다
아버지의 짜장면을 먹던 내가 오히려
늙은 아버지가 되었다

밤하늘은 짜장면처럼 캄캄하다
별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진다
서울에 사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다가
손수건을 꺼내 밤하늘의 눈물을 닦아준다

짜장면은 힘이 세다
짜장면을 먹으며 가난도 함께 나누면 가난이 아니다
죽기 전에 맛있는 짜장면을 한그릇 먹고 싶어하셨던 아버지처럼
나도 죽기 전에 짜장면을 먹고 당신을 기다린다

바보


바보는 웃는다
피는 꽃을 보고 웃고
지는 꽃을 보고 웃는다
감나무에 앉은 새를 보고 웃고
마당에 떨어진 새똥을 보고 웃는다
어떤 날은 개똥을 밟아도 웃는다

바보는 늘 웃는다
웃지 않을 때가 없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몸이 끼여도 웃고
아내와 자식이 욕을 해도 웃고
먹고 있는 밥을 빼앗아가도 웃고
물잔을 발로 차버려도 웃는다
어떤 날은 지갑을 잃어버려도 웃는다

바보는 그저 웃기만 한다
나라가 망해도 웃고
혁명이 일어나도 웃고
집에 불이 나도 웃는다
함박눈이 내려도 웃고
눈사람을 보고도 웃고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웃는다

마음이 없다


마음이 다 떠났다
마음에도 길이 있어
마음이 구두를 신고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버렸다
비가 오는데 비를 맞고
눈이 오는데 눈을 맞고
마음이 먼 길을 떠난 뒤
길마저 마음을 다 떠나버렸다
나는 마음이 떠나간 길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종로에서 만나 밥 먹을 마음도
인사동에서 만나 술 마실 마음도
기차를 타고 멀리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마음이 다 떠나면
꽃이 진다더니
내 마음이 살았던 당신의 집에
꽃이 지고
겨울비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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