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작이라 딱 이틀분 일기를 읽었을 뿐인데 가슴이 너무 먹먹하고 눈물이 줄줄 흘러서 밤에 읽어야겠…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입니다.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쓴 것입니다.
큰애는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극진한 애정으로 에미를 보살폈고, 에미의 숨은 마음까지 알아차리어 친구나 이웃의 방문까지 금해놓고 있었지만, 그래도 집만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울고 싶을 때 울 수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딸네 집만 해도 사위와 손자들의 생활이 있는, 이미 예전에 나로부터 분리된 남의 가정입니다. 수시로 짐승처럼 치받치는 통곡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통곡을 고스란히 참기가 너무 힘들어 통곡 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린 게 이 글입니다.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 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 그러나 미치기 위한 노력도 안하고 어떻게 맑은 정신으로 긴긴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줬지만 88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걸 어찌 견디랴. 아아,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이 지경이 되고도 무슨 볼 체면이 남아 있다고 내 꼴을 남에게 보이기가 그리 싫은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상대방을 볼 때는 그 자리에서 당장 꺼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생각해낸 말이 잊으라는 소리다.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잊으라는지. 세월이 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격렬한 반감이 솟구칠 때도 없다.
나에게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까닭이 남아 있다면 그 애를 기억하며 그 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통받는 일뿐이거늘.
꿈자리가 뒤숭숭했지만 무슨 꿈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꿈에라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잤건만 또 허탕이었다. 진실한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소리도 말짱 헛소리다. 인간의 애절한 소망을 일일이 이루어주진 못한다 해도 귀라도 기울여줄 초월적인 존재가 과연 있기나 있는지. 있다면 예서 더 어떻게 해야 당신과 통하리까.
남은 자식들한테 내 슬픔을 빙자해 응석을 부리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오 주여, 당신이 계시다면 저를 제발 이 마지막 자존심이나마 부지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게 하소서.
행복했을 때는 아침이 좋았는데 요샌 정반대다. 내 앞에 펼쳐진 긴긴 하루를 살아낼 생각이 지겹도록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시때때로 탈진하도록 실컷 울면 그 동안이라도 시간을 주름잡을 수가 있는데 그것도 용납 안되는 하룻동안이란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가.
먹은 건 없는데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 걸까. 정말 싫다. 예전 우리 시골에선 자식을 앞세운 에미한테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말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소리가 끔찍해 소름이 끼쳤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한테 해당하는 소리가 아닌가. 나야말로 자식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줄창 먹지 않고도 배부를 수가 없고, 먹지 않았는데도 수족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
내 아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땅속에 누워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이 어두운 땅속에 누워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하다니. 발작적인 설움이 복받쳤다. 나는 내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걸 여실하게 느낀다. 그 저지선을 느낄 수 없어야 미칠 수 있는 건데 그게 안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정말 있다면 내 아들의 생명도 내가 봉숭아를 뽑았듯이 실수도 못 되는 순간적인 호기심으로 장난처럼 거두어간 게 아니었을까? 하느님 당신의 장난이 인간에겐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손길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막 가지고 장난을 쳐도 되는 겁니까.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시편』, 15~16)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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