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우리 결혼하는 게 좋겠어." 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엄마가 내 결혼식을 보실 수 있게." 피터는 실눈을 떴다. 피터는 한 방 맞은 듯한 얼굴로 운전에 집중했다. 따뜻한 오렌지빛 새벽 햇살이 차창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팔을 뻗어 내 손만 꼭 잡았다.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여느 사람들처럼 피터 역시 도통 적절한 말을 할 줄 몰랐다. 이 남자의 위로 방법은 언제나 내 감정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냥 조용히 내 옆에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도 참 고마운 것이, 어차피 그것 말고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방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엄마가 끄응 신음을 내뱉었다. 이모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거실로 가서 외출에 필요한 물건을 주섬주섬 챙겼다. 우리 여섯은 자동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한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나는 아직도 완강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안정제 주사 한 방이면 엄마가 전처럼 괜찮아질 거라 확신했고, 그때그때 적당히 무마하면서 몇 년은 더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주일 안에 어떻게든 엄마가 회복해서 함께 제주도로 날아갈 수 있기를 고대했다. 이모는 이미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해두었다. 하지만 엄마는 상태가 점점 더 나빠졌다. 일주일이 지나고도 계속 병상에 누워 밤새도록 끔찍한 열과 오한과 싸웠다. 우리는 제주 여행을 취소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는 유진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마저 취소해야 했다.
이제 무안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누가 뭐래도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했고, 모든 것이 작용과 반작용일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엄마가 아직 주무시고 계시면 나는 병원 슬리퍼를 신은 채 승강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혹시 주변에 엄마의 정신을 돌아오게 할 만한 게,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떠올리게 할 만한 게 있는지 찾아다녔다.
엄마는 다리를 이불 밖으로 뻗고 등을 베개에 대고 꿈틀꿈틀 밀면서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정작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은 네 아빠인데." "난 여기 있는 게 좋아." "그래. 그래도 아빤 내 남편이잖아." 엄마가 말했다. "근데 여기 있어도 전혀 날 돌볼 줄 몰라. 구강 세척제를 갖다달라고 하면 그냥 그것만 덜렁 갖다줘. 컵도 안 주고."
"아빠가 재혼할 것 같아?" "아마 하겠지."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기도 했다. "또 아시아 여자랑 결혼하겠지." 나는 진저리를 쳤다. 또 아시아 여자일 거라니,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니 굴욕감이 밀려왔다. 아빠가 손쉽게 누군가로 엄마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시아인 성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것은 두 사람의 유대를 하찮게 만들었다. 우리를 싸구려로 전락시켰다. "난 못 참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절대 못 받아들여. 구역질나." 우리를 묶어줄 엄마가 사라지고 나면 아빠와 나는 거의 남남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는 암암리에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아빠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두 사람은 계속 티격태격할 게 뻔했다. 가족이라는 닻이 올려지고 완전히 해체되어버릴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꾸짖어주길 기다렸다. 그분은 내 아빠라고, 내 핏줄이라고 뚝 잘라 말하길 기다렸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평생 우리를 먹여 살린 사람에게 그러면 못쓴다고 말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내 등에 가만히 손을 대고, 우리가 차마 서로 말 못 하고 있는 부분은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는 네 도리를 다할 거야."
그때까지 나는 살아가기와 죽어가기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식물인간으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터였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미 찢겨나간 육체적 자율성의 조각들은 하루하루 누더기 꼴이 되어갔고, 이제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은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병상에 묶여 혼자 걸을 수도 없었고 각종 장기도 더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도 팔에 연결된 수액 주머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로 섭취하다가 이제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숨도 혼자 못 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모습에서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문득, 다섯 살 때쯤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다리 사이에 나를 끼워 앉히면 나는 연료통 뚜껑을 지지대 삼아 꽉 붙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보면 웅웅대는 엔진소리와 뜨끈한 연료통의 온기에 잠들곤 했다. 눈을 떠보면 이미 우리집 차고 앞일 때도 종종 있었다. 문득, 나쁜 일이라곤 모르던 그때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우리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한국 여행을 감행하는 위태위태한 줄다리기를 선택했다. 우리는 쟁취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시도했지만 날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다. 죽어가기 대신 살아가기를 택했지만 그 선택은 결국 끔찍한 실수로 판명되었다.
엿새 뒤에 비로소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부랴부랴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승강기 쪽으로 밀고 가는데, 복도에서 의사가 우리를 불러 세우더니 엄마에게 작별 선물을 건넸다. "이걸 보는 순간 환자분 가족 생각이 나더라고요." 의사가 엄마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아빠, 엄마, 딸 한 가족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작은 목각 수공예품이었다. 서로 바짝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가족은 흡사 나무 한 조각을 깎아 만든 것처럼 매끄럽게 연결돼 있었다.
기대한 대로 나의 결혼식 계획은 마법을 부렸다. 소소하게 종양특이항원 반응이 일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엄마의 의무 후송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어두컴컴한 장막을 확 열어젖히니 방안으로 새로운 빛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병마와 싸워서 지켜내야 할 대상이 생겼고, 우리는 엄마의 그런 의지를 적극 활용해 엄마가 움직이고 음식을 먹도록 독려했다.
내가 다음 세상에선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고 물을 때마다 엄마는 매번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엄마가 대단하고 영웅적인 것보다 소박하고 고요한 것으로 환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전혀 뜻밖인 동시에 내게 위안을 주었다.
엄마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고 잠시나마 엄마를 건강한 사람인 양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는, 그저 멋진 결혼식을 올리기에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날인 것처럼.
세상에 우리 엄마만큼 내 기분을 있는 대로 잡쳐놓을 수 있는 신랄한 사람도 없지만, 또 우리 엄마만큼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피터조차도 그렇게는 못했다. 나는 언제나 엄마가 하는 말을 마음속 깊이 믿었다. 내 머리가 조금이라도 헝클어졌거나 화장이 진하게 됐을 때 내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엄마가 고쳐주기를 계속 기다렸지만 엄마는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웃고만 있었다. 어쩌면 약에 취해 제대로 분간을 못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소한 비판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내심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랑은 행위이고, 본능이고, 계획하지 않은 순간들과 작은 몸짓들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고 나서 혼자 브루클린 창고에 누워 있는 나의 손을 잡아주려고 이 남자가 일이 끝난 새벽 세시에 뉴욕까지 차를 몰고 달려왔을 때, 사랑이 바로 이런 거란 걸 더없이 절실히 느꼈노라고 말했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이 남자는 몇 번이고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를 날아 내게로 와주었고, 6월부터는 연일 하루에 다섯 번씩 해대는 전화를 받아 참을성 있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 결혼이 좀더 이상적인 환경에서 시작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내 앞에 놓인 미래를 용감하게 걸어나가는 데 오직 이 남자 하나뿐이면 된다는 확신을 준 게 바로 이 시련이었다.
엄마가 계씨 아주머니와 아빠와 함께 걸어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봤다. 그게 행복의 눈물인지 아니면 끝까지 그 밤을 즐기지 못하는 처지가 속상해서 흘린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샴페인을 한 잔 더 마셨다. 결혼식을 실제로 하게 된 것에,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지 않은 것에, 모든 계획을 취소할 필요가 없었던 것에 한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잠시 걱정을 내려놓고 현실도피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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