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눈에 익은 공허한 모습이 아니었다. 기대에 차서, 경건하게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연의 모습이었다.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대축일 아침에 봤던 그런 세계였다. 세계가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면으로 들어가서 사는 일에 익숙해진 나머지 외부 세계는 내게 의미가 없다고, 유년기를 잃어버리면 세계의 밝은 빛도 잃어버리는 거라고, 사람은 영혼이 자유롭고 성숙해지는 대가로 이 사랑스러운빛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체념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이 단지 파묻히고 어둠에 덮였을 뿐이어서, 유년기의 행복에서 벗어나고 포기했던 사람도 이 세계가 빛나는 것을 보고 아이의 시선으로 내적인 전율을 맛볼 수 있음을 황홀하게 느꼈다.
가정부가 나가고 나는 거실에 홀로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자 곧장 내 꿈의 한복판으로 휩쓸려 들어간 듯했다. 문 위쪽 짙은 색 나무 벽에 높이 걸린 검정 액자 속에 내가 잘 아는 그림이 있었다. 지구의 껍질을 깨고 비상하려는, 황금빛 매의 머리를 가진 나의 새였다. 나는 깊이 감동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고통스러웠다. 이제까지 겪은 나의 모든 행동과 체험이 이 순간 해답과 실현으로 되돌아온 듯했으니까. 섬광처럼 빠르게 수많은 형상들이 영혼을 스쳐 지나갔다. 현관문 아치 위에 오래된 석조 문장이 달려 있던 부모님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크로머의 저주에 걸려 두려움에 떨던 어린 소년인 나, 조용한 기숙사의 한구석에서 꿈꾸던 새를 그리던 청년인 나, 제 스스로의 그물에 뒤얽혀 있던 영혼, 그리고 이 모든 것, 그러니까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한번이라도 내 안에서 메아리쳤던 모든 것들이 나 자신에 의해 긍정되고 응답받고 승인되었다.
이제 내 운명이 내 앞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은 심각하거나 고립되지 않고, 성숙하고 활기차고 기쁨에 넘쳤다! 나는 새삼스레 어떤 결심이나 맹세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목적지, 높은 길로 들어서는 지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약속의 땅까지의 여행길은 탁 트여서 경이로운 모습으로 뻗어 있었다. 가까이에 행복의 나무 그늘이 드리워졌고, 온갖 환희가 가득한 정원에서 땀을 식힐 수 있는 길이다. 앞날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지 나는 환희로 가득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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