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에 맞지 않고, 제 구실을 하지도 못하고, ‘세상이 정한 대로’ 생기지도 않은 쓸모없는 몸에 갇힌 느낌 말이다.

사실, 나는 매일 밤마다 가련한 내 자신만 아니라면 아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도 알고 있다.

내가 해낸 일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 안에 자부심을 가진 엄마로 비쳐 있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딸아이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가련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을 보기를

엄마의 슬픔도 우리와 함께 이사를 온 것인지 궁금하다. 그것이 이 새 집으로 옮겨왔는지, 예전 집, 아이를 잡아먹는 광견병 걸린 개 옆집에 남아 있는지?

언어를 좋아했다. 문장의 리듬과 흐름, 그것이 함께 모여 자기만의 세상을 만드는 방식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나 단조롭고 일차원적인 교과서에 흥미를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부러울 것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 가득했다. 사방에서 그걸 느꼈다. 내 방 창문에서 보이는 풀 뜯는 소처럼, 슬픔도 또렷이 보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코를 찌르던 고양이 오줌 냄새처럼, 슬픔의 냄새를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방치해놓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 다리를 간지럽히던 정원처럼, 그 슬픔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내향적인 사람은 내적인 세계(즉, 우리의 가련한 자아)에 집중하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주위의 외부 세계에 더 끌린다는 것이다(<X팩터> 참가자들과 <로열 버라이어티>[4]쇼 공연을 생각해보라). 인생이 그렇듯이, 그 무엇도 어느 한쪽에만 완전히 해당되는 것은 없고, 마이어스와 브릭스는 훗날 이 이론을 발전시켜 우리는 모두 그 중간의 어디쯤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러한 발상이 마음에 든다. 나는 이 등급의 어딘가 중간쯤에 위치하는 반면, 가장 내향적인 쪽 가장자리에는 분명 엄마가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중간쯤 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나는 내향적인 쪽에 가깝고 거기 만족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이고 싶지도 않고, 그럴 욕구도 없다. 조용한 몇몇 사람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바쁜 삶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갈망한다. 그러나 마이어스-브릭스의 이론이 보여주듯이 나의 이런 성향은 바뀌기도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내향적인 것이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아니라는 것이다. 내향적인 성격이 양극성 정동장애(혹은 과거에‘조울증’이라고 부르던 장애)와 늘 함께 다니는 것은 아니다. 정도와 관계없이, 내향적인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납득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그렇다. 여러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토요일 밤에 시끄러운 노래방에 나가고 싶지 않은 것, 폐쇄공포증을 일으키는 우울한 쇼핑센터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 박싱 데이 세일(12월26일 영국 상점들이 실시하는 대대적인 세일?옮긴이) 때 그곳을 어떻게든 피하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사람들은 ‘기운’이나 ‘분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엄마 주위에서 받는 느낌은 숨 막히는 불편함, 어색함, 당혹감이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루한 슬픔이었다.

요즘 우리는 다행히 숱한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서 터놓고 이야기하고, ‘우울증’이라는 용어는 별 생각 없이(완전히 오해되어 오용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부작용을 제쳐두고 나면, 지금은 예전보다 우울증의 고통을 인정받고 지지받기가 쉬워진 것도 사실이다. 즉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아무도 우울증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따뜻하게 배려하는 유토피아에 산다는 말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그런 상태가 실제로 존재하며, 삶의 어려움을 감추기 위해 써먹는 허구의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예전보다는 커다란 진일보라는 말이다.

타고난 것이든지, 습득한 것이든지, 혹은 두 가지 모두였든지, 나는 똑같은 특징을 내보였다. 아주 어린 나이에도 내 머릿속에는 ‘자아’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바보처럼 보일까, 부족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게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이 두려웠다. 두렵고 불안한데, 그게 무엇 때문일까? 사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나라는 사실이 두렵고 불안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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