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은 늘 가라앉아 있고 어떤 상황에도 차분했다. 상대가 아무리 서운해해도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모든 만남과 감정은 일정한 절차에 맞춰 진행된다. 적절한 반응, 과하지 않은 미소와 친절은 상대방에게 내가 적합한 연애대상임을 인정받는 하나의 시험인 것이다.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적거려봐도 내 주머니엔 반짝이는 특별함이 아니라 별 쓰잘머리 없는 것들만 들어 있었다.
내가 아무리 뛰고 소리쳐도 눈앞의 벽을 깰 수 없을 거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주머니에 반짝임은 없더라도 사소한 것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 있기를. 나의 역할과 존재가치를 일깨울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쥘 수 있기를.
초라하거나 절박하고 허름한 면은 철저히 숨긴 채, 아쉬울 것 없고 당당하고 강한 면만 보여주려 애썼다. 그렇게 꾸며진 연기는 꽤 자주 자연스럽지 않았고, 그래서 간혹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드라마의 허점을 들키고 말았다.
모든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이제 머리로는 알았으니 마음만 고쳐먹으면 될 텐데, 나는 제 버릇을 남 못 주고 계속해서 연출에 빠져 있다. 글러먹었다. 도무지 고쳐질 것 같지가 않다. 이제는 내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삶에는 ‘진짜 나’ 대신 ‘만들어진 나’만 있었다. 언제부턴가 진짜 나는 어두운 방에서 외로움에 잔뜩 움츠려 있었다. 진짜 나는 다짐한다.
상처 앞에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없다
피해자도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도 피해자가 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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