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나는 무엇을 하든 뜨개를 빼놓을수 없게 됐지만, 내 일상이 이렇게 바뀐 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이따금 처음 뜨개를 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조용히 찾아온다고했던가. 뜨개를 시작한 데에는 특별한 계기랄 게 없었다. 내가 뜨개를 선택한 게 아니라 뜨개가 나를 찾아왔다고 할 수밖에. - P17
부유하든 가난하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누구나 정해진 만큼의 밥을 먹고 숨을 쉬며 하루를 보낸다. 그런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인생이 된다. 한 번에 한 걸음씩을 좋아하는 내가 뜨개를 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뜨개는, 아니 뜨개야말로 한 번에 한 코씩만 뜰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P38
애호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겹겹의 우주가 있다는 걸 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 그리고 나의 그우주 안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만의 우주를 가진 사람이다. 우주를 부유할 때만 알 수 있는 가치와 시간이 있다. 지구에서 보기에는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거리를 하염없이 떠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를 몸소 가로지르는 이들은 정교하게 계산한 시간표에 맞춰도착 지점에 근접하겠다는 목표하나로 온 하루를쓴다. 그런 하루가 모여 달이 되고 해가 된다. - P43
새 실의 라벨을 풀어 코를 잡으려는 나를 보고 남편이 묻는다. 이어지는 질문. "저번에 뜨던 목도리는 다 떴어?" 앞선 질문보다 한층 호기심 어린 목소리다. ‘당연히 다 안 떴지. 그걸 꼭 물어봐야겠어?‘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소리 내어 말한 대답은 이거다. "목도리는 겨울 거고 이제 여름이니까 여름 거먼저 하나 뜨려고."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코를 잡기 시작한다. 먼저 뜨던 걸 다 떠야 새걸 시작할 수 있다고 법에 정해져 있기라도 한가. 뜨고 싶으면 뜨는 거지. 그때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남편이 뉴스를 보며 기도를 하고 있다. TV에서 안타까운 뉴스를 볼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는 건 얼마 전천주교 세례를 받은 남편에게 생긴 새로운 습관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뜨던걸 완성하지 않은 채 새로운 걸 시작해도 되느냐는 질문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남편의 목소리로 재생한 것이었다. - P55
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하루가 짧다. 아마 앞으로도 좋아하는 일의 범위를 좁히지는 못할 것이다. 더 넓어진다 해도 자제할 마음은 없다. 기꺼이 잡스럽게 거침없이 산만하게 좋아하는 일을 늘려갈 생각이다.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대체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재미있는 건 뭐든 다. - P66
엉킨 실을 풀다 보니 요령이 생긴 것도 같았다. 그 요령이란 엉킨 한가운데, 즉 카오스의 핵부터 건드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손가락도 아프지만, 어쩌다 매듭 하나를 풀었다 해도금세 다른 매듭에 가로막혀 인내심이 바닥나기 쉽다. 가위로 싹둑 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달콤한 유혹이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엉킨 실을 푸는 데 가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엉킨 실 한 덩이를 두 덩이로 나눠놓을 뿐. - P73
지퍼백에 담은 손 염색실은 여전히 서랍 안에 잠들어 있다. 그런 실도 있다. 뜨개는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풀지 못한 실로는 뜨개를 할 수 없다. 풀어낸 해봤자 얼마 뜨지 못하고 카오스를 만날 테니까. 그런 실로 하는 뜨개는 흉내일 뿐이고,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더는 예쁘지도 부드럽지도 않지만 내 소란했던 마음을 고스란히 안고 잠든 실. 그런 실이 있다. 그 곁에 나와 함께 엉킨 실을 풀어보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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