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 고여 있는 이 고독감에 점차 익숙해지다보면 나름의 평화가 구축된다. 하나의 완벽한 생태계처럼 외톨이로서의 세계가 확립되는 것이다. 식사도, 음주도, 산책도 홀로 하는 고즈넉한 생활. 외로움마저 이 평화의 일부가 되어 혼자라는 상태에 만족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 P219
예술이 너무 훌륭하면 그 우미함에 질리게 된달까,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말하자면 ‘너무 완벽한‘ 것이다. 그럴 때 이런 소소한사람의 흔적을 발견하면 나는 와락 그것이 좋아지곤 한다. 늘 고상하고 단정하기만 한 사람이 젓가락질을 괴상하게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친근하고 다정한 기분이 든다. 장난스러움이나 허술함 같은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 그것이 내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인 것 같다. - P224
살아생전 이처럼 뜨겁게 살았던 사람들이 왜 스스로 삶을 놓았을까. 그들의 그림과 글은 이다지도 생명력이 충만한데 왜 그들은 자살을 택했나. 그이유는 결단코 ‘삶을 향한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 게다. 어쩌면 그들이 삶을 놓은 이유 역시 그들이 너무 격정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P228
역설적으로 실제 죽음을 택한 건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사는 동안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쏟아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객기 충만한 사춘기 소녀처럼 자살을 추앙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다시금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삶은 고단했을지언정 그림에는 에너지가 넘쳤던 고흐처럼. 황금빛으로 물결치는그의 해바라기 앞에서 난 전혜린의 글을 생각했고, 나를 생각했다. 결국더 뜨겁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P229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라고 언어조차 없다 생각하는 것은 실례 아닌가. - P237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다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다. 지독하게 외로운데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누구도 그립지 않은 상태에 빠져본 적이 있다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때로 왁자한 모임에 초청받지만 타인과의 교분 자체가 피곤해 스스로 약속을 파기하고 둥지로 파고든다. 그런 주제에 날개에 얼굴을 묻고 꺼억꺼억 외로워한다. 이렇게 외로워할 바에야 이제라도 그곳으로 향할까 싶지만 여전히 사람이 그립지는 않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갈될 외로움이 아니기에 그저 혼자이고 싶다. 그렇게 홀로 치열하게 외로워하는 것이다. 역시,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한다. - P242
런던의 기본 날씨는 그림 그리다 붓을 씻은 물통처럼 칙칙한 하늘에, 한눈에 봐도묵직해 보이는 검정 구름이 정수리에 닿을 듯 낮게 깔린 그런 날씨였다. 그 와중에 이따금 스프레이로 뿌리는 것 같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때로는 온종일 스커트 자락을 붙들고 있어야 할 정도로 돌풍이 불기도 한다. 날씨가 이 따위이라서 런던에선 햇볕 한 자락이 더욱 소중하고 해만 나면 다들 공원에 눕느라 정신이 없다. - P252
이곳은 천장에 거대한 유리창이 있어서 비가 내리면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따뜻한 초콜릿을 홀짝이며 그림노트를 펴고 낙서를 하다 고개를 들어 회색빛 하늘이 어어 번져가는걸 보면서 참 행복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지붕 있는 곳에 머물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비 때문인지 감성은 더없이 습해졌다. 낭만적인 감상에 빠져도 괜찮아, 나는 혼자니까. - P256
익숙한 모든 것과 거리를두려고 떠난 여행이었다. 습관적인 행복 공포증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큰 소리로 ‘나는 행복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왜? 왜 행복하다고 인정하면 안 되는 건데? 왜 걱정하며 사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고 하는 건데? 행복을 인정하면 행복이 더 큰 행복을 불러올 수도 있잖아. 부정적 생각 따위 끼어들 틈도 없이 철저하게 행복해지자. 나는 그렇게 나 자신에게 소리쳤다. - P260
아직 숨이 붙은 동무를 사지에 두고 온 것 같아 계속 생각나고 그랬다. 무겁구나, 생명의 무게여. 나는 이제 식물을 기르지 않을 것이다. 안녕, 나의 민트 - P266
그 애도 나이가 들고 훗날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할 때가 올까? 지금의 나처럼 어지간한 것에는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이가 많은 걸 보면 뭔가 있겠지‘ 하고 의미를 찾을 때가 올까? 그런 무던한 시선의 사람들이 똥인지 된장인지 품평할 줄도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라, 그런투덜이 시기를 다 겪고 초연해진 사람들이라는 걸 알 때가 올까? 바라건대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 악감정의 전이에 고통받을 주변인을 위해서도, 행복이라곤 없을 자신을 위해서도 - P270
세상천지 모든 사람이 친절한 서비스 마인드로 무장하기란 어려운 법이고, 세상에는 모난 사람도 많기에 외국에서 장기체류를 하다 보면 여지없이 그런 지뢰를 밟게 된가. - P271
이런 작은 일에 수없이 의기소침해지고 하루를 날려먹은 끝에 나는 나름의 해결책을 찾았다. 고국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슬렀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따뜻하고 훈훈했던 기억을 돌아본 건 아니고 오히려 나에게 불친절했던 한국 사람들을 떠올리며 구겨진 마음을 폈다. - P272
나는 지금 런던 사람과 한국 사람의 친절도를 비교하는 게 아니다. 어디가 낫고 어디가 못하다고 품평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익숙한 고향땅이든, 생경한 이국땅이든 불친절한 사람은 어디에나 비슷한 빈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결국 그 사람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이지 외톨이 동양인 여행자라는 내 조건에서 기인한 문제가 아니다. 설사 그 사람이 실제로 날 얕잡아보고 그랬다손 쳐도 그 역시 그 사람의 수준 문제인거다. 두고두고 마음 쓸 이유가 없는 거다. - P274
가끔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건 어떤 특수한 종류의 프리즘이 아닐까 하고 이 투명한 물체는 분명 내 손 안에 있는데도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유리알처럼 말갛고 물처럼 속이 훤히 비쳐서 마치 없는 듯 감쪽같기만 하다. - P282
분명 내 손에도 프리즘 한 개가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손을 쳐다보며 내게는 저 무지개가 없다고 한숨 짓는다.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도무지 고쳐지질 않는다. 행복의 방법을 뻔히 알면서도 안되는 거다. 타인의 눈에는 분명 내 무지개가 보일 텐데 어째서 나는 아무것도 없는 듯 여겨질까. 내 손안에서 무지개를 보기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정말 행복하고 싶은데, 행복해지기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 P283
나는 원체 나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편이다. 어쩌면 소심한 성격 탓에 타인의 별 뜻 없는 언행에 숱하게 상처받고, 그렇게 심약한 자신에 자괴감을 느껴 ‘나는 왜 이럴까‘를 빈번히 생각하다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P300
가장 큰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사람은 혼자서도 살아지더라는 것. 그동안 나는 숱하게 ‘관계‘ 속에서 번민하며 살았다. 중고교 시절 좁디좁은 학교라는 집단 안에서, 소외되는 것을 죽음처럼 두려워하며 살다가 혹 대학에가면 나아질까 희망을 품었거늘 결국 어느 사회에 있건 인간관계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한결같았다. - P301
결국 문제는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가치를 관계를 통해서, 남의 눈을 통해서만 파악했기에 타인의 관심과 인정이 없는 삶은 상상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 남, 오직 남을 의식하며 살았기에 누군가의 뚱한 표정과 사소한 핀잔에도 수없이 나를 다쳐가며 살았다. 세상 사람 전부가 나를 좋아해야 했고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괴로웠다. - P303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그토록 소외를 겁내왔지만 이렇게 철저히 관계에서 유리되어서도 살아지더라는 것. 죽을 만큼 외로워도 결국 죽지는 않는다는 것.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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