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를 배웅하러 나섰다. 내가 여기 있은지 벌써 넉 달이 넘었지만, 런던에 막 도착한 아빠는 내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파란 여름 밤, 오랜만에 아빠 손을 잡고 별 말도 없이 한참을 걸어 집으로 왔다. - P170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전혀 유명하지 않은 미완성작인 <저녁 별Evening Star)이었다. 바닷가 마을, 한 소년이 광주리를 들고 귀가하고, 작은 개가 반가운 듯 소년 곁을 맴도는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 제목은 ‘저녁별인데 대체 별이 어디 있는 거지, 하는 순간 화폭 중앙에 빛나는 단 한개의 작은 별이 보인다. 터너가 얇은 붓을 들어 툭 찍었을 하얀 유화 물감이 작은 별로 둔갑해서 마음속에 박힌다. 그 방 전체에 별이 뜬 것처럼 마음이 환해진다. - P174

나도 십대 혹은 이십 대 초반의 청춘남녀를 보면 그 파릇파릇함이 너무 부러워 나도 모르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니 맘껏 도전해보라‘는 둥 너무 흔해빠져 급훈으로도 안 쓸 말이 곧잘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나 역시 숱하게 같은 말을 들었지만 전혀, 일절,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다들 좋은 시절이라 하는데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지금을 즐기라는데 어떻게 즐겨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P178

역시 갖고 있으면 귀한 줄 모른다. 후에 돌아보고 "아, 그때 정말 제대로즐겼어야 하는데" 하고 회한에나 사로잡히는 게 인간이다. - P181

무엇보다도전체 군집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여 각각의 개미에게 자아가 없다는사실이 슬프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 P182

나는 늘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 대해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나 그저 얌전히 결과를 기다려야 할 사항마저도 전부 끌어안고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때로는 걱정이 내게 껌처럼 엉겨붙었고, 때로는 내가 걱정에 아교처럼 달라붙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지쳐 나자빠질 정도가 되어야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벗어났다기보다 잠깐 쉴 수가 있었다.
내 일상은 잘못 돋아난 거스러미 하나 없이 모든 것이 평평하고 말끔해야했다. 매끈해야 할 내 삶에 뭔가 까칠하게 거슬리는 게 싫었다. 글씨가 삐뚜름하게 써진 공책 첫 장은 결국 뜯어내버렸던 것처럼, 아물지도 않은 상처마저 건드리고 건드려 결국 딱지를 떼버렸던 것처럼, 나는 반질반질한 평화를 깨는 뭔가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했다. - P188

‘모든 것을 날씨처럼 생각하기‘는 큰 효험이 있어서, 여행 기간 내내 큰 힘이 되어주었다. (중략) 숱한 문제가 생겨도 예전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저 적당히 떨어져서 보는 여유를 얻었다. 문젯거리를 늘 보물처럼 끌어안고 소일 삼아 걱정하던 내가 그 모든 트러블을 슬며시 내려놓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르는 ‘안달병‘이지만, 이런 회복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190

급성 고독감
술에 취해 들어왔다.
복통처럼 외로웠다.
네모난 방에 동그랗게 누워
고독을 잊으려 잠을 덮었다.
밤은 얕고 잠은 깊었다.
뿌연 아침이 왔다.
외로움은 가셨다.
복통이 왔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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