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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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언어’와 '도구'의 사용이다. 물론 일부 동물도 도구를 사용하고, 일정한 패턴의 언어 -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을 언어라고 하지는 않지만 - 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인간과 같이 도구를 정밀하게 가공하고, 사용하는 동물은 없다. 인간처럼 체계화된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도구와 언어를 제대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 혹은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잔다.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다. 동물은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본능만이 동물의 유일한 동인이다. 반면 인간은 본능을 넘어서서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움직인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는다. 그것을 찾기 위해 살아간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이다. 사이보그는 뇌를 제외한 발, 다리, 내장 등을 기계로 교체한 생물과 기계장치의 결합체를 뜻한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이다. 비록 몸은 기계이지만 뇌는 인간의 그것이기에 생각을 할 수 있다. 자의에 의해 움직인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이다. 단지 모습만 인간일 뿐 완전한 기계이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프로그래밍에 의해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일 뿐이다. 혹은 조정자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한 공상과학 소설에서는 안드로이드를 단순한 기계 덩어리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통해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로 묘사한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속성까지 일정부분 인간과 같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감정이 없다.

 

 "2058 제너시스"

 

 이 소설은 현재보다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 세계에 대전쟁, 즉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염병까지 대유행하여 인류는 멸망으로 치닫는다. 2052년에 전 세계에 전염병이 퍼지자 플라톤이라는 한 인물이 남태평양의 한 섬의 주위에 방벽을 쌓고, 전쟁과 전염병으로 신음하는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공화국을 건설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담이라는 한 보초병에 의해 공화국에 위기가 닥친다.

 아담은 무모한 반란을 시도한다. 뗏목을 타고 공화국의 방벽으로 다가오는 소녀를 제거하지 않고, 살려 준 것이다. 공화국의 법에 따르면 해안방벽을 지키는 보초병은 배를 타고 다가오는 외부인을 발견 즉시 사살해야 한다. 하지만 아담은 이를 무시하고, 소녀를 피신시킨다. 동료를 살해하고 말이다. 이에 아담은 감옥에 갇힌다.

 소설은 액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낙스의 면접과 아담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 된다. 아낙스(아낙시맨더)는 공화국 최고의 지성집단인 학술원에 들어가기 위해 면접을 치른다. 아낙스의 연구 및 발표 대상은 공화국의 역사와 문제의 인물인 아담이었다. 총 4시간, 4교시 동안 진행 되는 면접에서 아낙스는 아담을 두둔한다. 과연 아낙스의 면접 결과는 어떻게 될까?

 감옥 안에 갇힌 아담은 그를 상대하는 안드로이드인 아트와 논쟁을 벌인다. 둘은 인간과 로봇의 차이에 대해 논한다. 아담은 로봇과 인간의 차이를 '생각', 즉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담의 (모든) 주장은 아트의 반론에 막힌다. 급기야 아트의 충격적인 발언, 관념 또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말에 아담은 변변한 항변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문다. 하지만 마침내 논쟁의 끝에 아담은 로봇과 인간의 차이를 발견한다.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차이를 말이다.

 

 비록 적은 양의 소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과 과학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세계로 인도한다. 관념, 로봇, 진화 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한데 섞여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말미에 담긴 놀라운 반전이 독자들을 충격에 빠지게 한다. 초반 진행이 다소 어색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흥미를 더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소설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그것을 '관념'이라 이야기 했다. 그렇다. 인간과 동물, 특히 인간과 로봇의 결정적인 차이는 '관념'에 있다. 즉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 아마도 보다 먼 미래에는 - 로봇도 뛰어난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과 같이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입력된 방대한 자료를 조합하고, 연산하여 - 새로울 것이 없는 - 결과물을 출력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인간처럼 새로 입력되고, 이미 입력된 자료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진정한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하여도 로봇은 인간과 같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로봇의 겉과 속이 제 아무리 인간의 것과 매우 흡사해지더라도 단 하나는 절대로 같아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감정'이다. 인간과 로봇의 진정한 차이는 생각이 아니라 감정, 아니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그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만들 수 없는 '영혼'의 소유 유무에 있다. 로봇의 인공지능이 아무리 인간의 모든 것을 흉내내더라도, 설사 희노애락과 미움, 그리고 사랑의 감정까지 정교하게 표현한다 하더라도 로봇은 인간이 가진 영혼은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영혼 조차 진화의 산물인지 아니면 정말로 신의 선물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을 위한 세상 유일의 가장 경이로운 작품이다. 그 단 하나의 작품으로 인해 오직 인간만이 인간일 수 있고, 다른 모든 존재는 인간과 같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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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잘못된 기독교 분별 시리즈 4
레이 윤겐 지음, 김성웅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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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과 관련이 있는 기독교의 '관상적 영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동양의 비학(Occult / Occultism)의 관련성을 분석하고, 주의를 줍니다. 주로 집중하는 문제는 영성(적) 훈련의 하나인 '관상 기도 - 침묵 기도'입니다.

저자는 '관상적 영성' 의 오류와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p211)

1. 성경적이 아니다.
2. 신비종교의 방법론에 연결 되어 있다. (만트라, 중언부언)
3. 동양의 신비사상에서 나온 개념들에 관대하다. (모든 것 안에 있는 신, 모두가 하나 - 내재신론 등)

 책의 내용은 앞서 말한 것에 더하여 위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기독교에 동양의 신비사상이 결합된 원인과 역사를 추적합니다. '관상적 영성 및 관상 기도(침묵)'의 문제점을 짚는 동시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관상적 영성의 문제와 관련된 이들은 놀랍게도 우리와 상당히 친숙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위주로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생각나는 순서대로)

달라스 윌라드, 릭 워렌, 헨리 나우웬, 브레넌 매닝, 게리 토마스, 유진 피터슨, 맥스 루케이도, 브라이언 맥클라렌, 토마스 머튼, 리차드 포스터, 브라이언 트레이시, 로렌스 형제

등 입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관상 운동가들, 뉴에이지 신봉자들, 이머징 운동주자들로 분류 됩니다. 저자는 특히 토마스 머튼을 몇 년 사이 신비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말하며 그 운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 외에 저자가 특별히 실망한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드 제러마이어와 찰스 스윈돌입니다. 이들은 미국 기독교에 오랜 영향을 끼친 이들인데 조만간 신비주의 운동을 따를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타임지가 05년에 선정한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명'에 포함 된 릭 워렌과 브라이언 맥클라렌도 이 문제에 관계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 중 릭 워렌은 이미 '목적이 이끄는 교회'와 기타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고,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머징 교회 바로 알기' 에서 강하게 지적하는 이머징 교회의 중심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금식, 기도, 자선 베풂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침묵 훈련을 포함하지 않고 가르치는 영적 훈련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훈련이라는 말을 쓸 때는 거의 언제나 관상적 영성이 함께 간다는 것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습니다.(p334)

 (저자의 주장 대로만 생각하면) 관상적 영성은 그 자체로 문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은 게 좋은거다'라는 생각으로 그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신은 분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분별력을 잃은 채 수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적극 권한다는 점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매우 영향력이 있고, 신뢰 받는 이들이 그러한 잘못을 자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 의해 평신도들은 아무 의심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게 가장 우려 할 만한 점입니다. 특히 귄위에 쉽게 순종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욱 위험성이 큽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관상 기도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서적도 많고, 위에서 언급된 이들의 저작물들을 접하고, 따르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심각한 것은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이들이 그 책들에 추천서를 썼다는 점입니다. 

 저 또한 신앙의 초기에 관상 운동가들의 책을 읽고, 좋다며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좋은 게 마냥 좋은 건 절대 아니라는 - 그렇다고 모든 좋은 것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좋은 것 중 어떠한 것이 그렇다는 - 사실입니다. 좋은 건 단지 좋은 것일 뿐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신앙만 위험한 게 아닙니다. 성숙된 신앙도 미혹의 영에 언제 고꾸라질지 모릅니다. 성경을 꽉 붙들지 않으면 누구라도 쉽게 미혹 될 것입니다. 성경을 꽉 붙들고 있어도 바짝 깨어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미혹 될 것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미혹의 영이 더욱 교묘히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성경의 엄중한 경고를 더욱 명심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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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톰 라이트 지음, 노종문 옮김 / IVP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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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악을 방치 하시는가?", "왜 전쟁을 가만 두시는가?"

 

등등 말입니다. 다툼, 미움, 살인, 전쟁 등은 악입니다. 악이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끊임 없이 위와 같은 의문을 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께서? 높은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는 다른 높은 뜻이 있으시다고밖에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더 나은 설명을 요구합니다. 납득할 수 있는 이해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을 통해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사람들은 계속 같은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세상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악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논합니다. 악의 문제에 대해 위와 같은 기존의 설명이 아닌 조금은 다른 설명을 합니다. 악의 문제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고, 이해합니다. 악의 문제를 조금 꼬아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관점에서의 설명을 원하는 이라면 실망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자인 톰 라이트가 이야기하는 악의 문제는 본인이 기대 했던 내용과는 너무 달라서, 기존의 설명을 기대 했던 본이이기에 적잖이 실망 했습니다. 하지만 악의 문제에 대해 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실망스럽지는 않습니다.

 

 앞서 몇 번 언급 했듯이 악의 문제를 기존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이라면 이 책에서 별 소득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 악의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폭넓게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이라면 놀라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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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 거룩의 본질·장애물·난관·근원 Coram Deo 코람데오 시리즈 1
J. C. 라일 지음, 장호준 옮김 / 복있는사람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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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원래 구입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에게서 거룩의 흔적을 볼 수 없고, 거룩을 위한 조금의 노력도 없어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거룩이란 무엇인지 깊게 묵상하고, 거룩울 추구하고자 구입하였습니다. 처음 만나는 저자인데 다른 책에서 인용되는 것을 보니, 그렇게 단편적으로 판단하건데 꽤 탁월한 저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총 20편의 설교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설교 방식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같이 성경 위주입니다. 이야기를 관심을 끌만한 예화로 치장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성경으로만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그래서 더욱 성경 말씀과 설교에 집중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설교 방식이긴 하지만 오늘날 설교자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설교가 '거룩'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거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이렇게 거룩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거룩한 자의 모습, 거룩하지 않은 자의 모습 등과 같이 거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합니다. 게룩에 대해 에둘러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함으로 거룩이란 어떠한 것인지 알려 줍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묵상하면 거룩함이란 어떠한 것인지 발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묵상 없이 읽는다면 거룩에 가깝게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서 살짝 언급 하였듯이 저는 거룩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거룩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거룩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생겼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거룩해지자'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여전히 거룩을 외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점점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점점 무관한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을 향한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뜨거운 열정을, 보다 정결한 영혼을, 보다 온전한 모습을 갖기 위해 분투하며 그것들이 채워져 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이것이 거룩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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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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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박사.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한국 지성의 대표로 생각한다. 이 박사는 문화부 장관 등 자신의 이력에 맞게 문화와 관련된 글을 많이 썼다. 그는 자신의 나이만큼이나 많은 글과 책을 썼다. 그의 글은 독특했고, 재미가 있다. 참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글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앎의 기쁨을 안겨 준다. 어떻게 그런 깊은 통찰을 발 할 수 있는지 존경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특히 오랜 시간 지성의 편에 서서 종교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 종교에 맞선 그의 글은 무신론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입장을 바꿨다. 인생의 느즈막히 갑자기 자신의 신념을 고쳤다. 불현듯 자신이 반대하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따르던 많은 이들을 실망 시켰다. 어쩌면 자신의 팬을 잃을지도 모르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그런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 누구보다 종교를 반대했던 그가 말이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이 책은 이어령 박사의 기막힌 인생의 전환점에서 쓴 책이다. 교토에서의 외로운 생활에서부터 회심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동안의 외로움과 딸에 대한 회상 등 그의 고독과 고민이 담겨 있다. 그것들을 통해 그의 신념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고백한다.

 아마 인생을 살며 고독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혼자여서 고독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해도 고독한 게 인생이다. 그렇기에 고독을 논하지 않고는 인생을 논할 수 없다. 이 책에는 이 박사의 고독이 담겨 있다. 교토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느낀 외로움이 배어 있다. 부모님에 대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 특히 인생의 근본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한다. 그의 고독은 짠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그리움은 기독교인에게는 큰 공감을 줄 것이다. 반대로 비기독교인에게는 어느 정도의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이어령 박사는 냉철한 지성으로 하나님을 철저히 거부한 무신론자였다. 성경을 읽긴 했지만 단지 지식을 위해 읽은 그였다. 그는 70 평생 하나님을 거부해 왔다. 그러던 그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놀라운 혹은 황당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의 변화는 딸로 인해 찾아 온다. 너무도 똑똑했던 그의 딸 민아. 그녀는 참으로 전도 유망 했지만 어느 날 암에 걸려 인생의 고비를 맞는다. 그리고 오랜 치료 끝에 병을 치료한다. 하지만 병이 재발하여 그녀를 다시 고통에 빠뜨린다. 또 다시 병과의 사투를 벌인다. 이윽고 놀랍게도 언제 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완쾌 된다. 그리고 다시 일상을 맞이한다. 어찌된 일일까? 이번에는 망막 이상으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 전과 같았으면 크게 슬퍼 했겠지만 이제 그녀는 실망하지 않는다. 이전에 암에 걸리고, 그것이 재발 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평온한 모습이다. 이 박사는 그런 딸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하나님은 왜 딸을 아프게 하실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일까? 어느 날 딸의 눈은 씻은 듯이 낫는다. 그 영향으로 이 박사는 세례를 받게 된다.

 이어령 박사의 회심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극적이다. 몇 번에 걸친 딸의 건강 악화와 회복. 너무도 아끼던 손자의 죽음. 이 모든 일을 통해 그는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영혼의 변화를 가져온다. 지성을 앞세우던 그가 마침내 영성에 굴복 한다.

 이어령 박사를 보고 있으면 사도 바울이 생각난다. 누구보다 지성적이었던 사도 바울.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섰다. 하지만 놀라운 회심을 하고 난 후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누구보다 앞장 섰다. 지성적인 사람이 영성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에 이 박사를 견줄 수는 없지만 행보가 비슷하기에 이 박사의 변화에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더욱 기대한다.



 지성과 영성. 어떻게 보면 그 둘은 상충 할 것 같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그 둘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둘 중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살 수는 없다. 그 둘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영성을 무시한다. 지성만을 추구한다. 균형을 잃고 산다. 균형을 잃은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지성에 영성을 더하는 것은 어렵다. 반대로 영성에 지성을 더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그 둘의 조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깨닫고,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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