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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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는 레슬리 뉴비긴으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목회자이다. 그러나 서구 진보와 보수 양진영에서는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교회에 대한 신학적 연구를 한다. 상당히 해박한 지식으로 교회, 그것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논한다. 

 본문은 총 6개의 장으로 구성 되어 있다. 주요 부분의 주제만 보면 2장 ’신자들의 회중’,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공동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모든 민족을 향한 선교’ 등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본서의 주제를 논의하게 된 배경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의 붕괴’, ’기독교 선교의 경험’, ’에큐메니컬 운동’ 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세계의 붕괴’는 "서구 유럽에서 복음과 문화의 통합이 와해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것은 해외 선교 경험과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을 통한 비기독교 세계와의 접촉 등을 뜻한다. ’기독교 선교의 경험’은 "유럽 바깥에 있는 비기독교 종교 문화들과 접촉하는 것을 계기로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 질문들과 교회의 본질에 관한 의문이 제기" 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 ’에큐메니컬 운동’은 "근대 선교 운동이 낳은 하나의 부산물"로써 앞서 ’기독교 선교의 경험’으로 인한, 다시 말해서 "새로운 선교 경험 덕분에 교회들은 따로따로인 관계에서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에서 협력하는 관계로, 그리고 협력하는 관계에서 유기적인 연합으로 진전되어" 그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발흥으로 이어졌음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배경으로 본서의 내용이 진행된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교회의 선교적 역할에 대해 집중을 한다. 위와 같은 배경과 저자 본인의 오랜 선교 경험으로 인해 교회의 본질을 선교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교적 교회론을 주장하며 교회의 본질을 풀어나간다. 이 책을 통해 교회의 본질, 특히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 잠깐 이야기 하고 본 글을 마치려 한다. 이 운동은 기독교 교파들 간의 다양성 존중과 일치를 꾀하는, 교리보다는 제자의 삶을 강조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복음의 실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이해하는 기독교 신학 운동(위키피디 참조)이다. 기독교 교파들의 교리가 선교 활동에 지장을 주자 선교적 상황에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극복하고,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결성 되었다. 따라서 인도에서 오랜 선교 사역을 하며 교회의 불일치를 경험한 레슬리 뉴비긴이 이 운동에 가담 하고, 교회의 본질과 선교에 에큐메니컬을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본서를 썼을 때는 에큐메니컬 운동이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지금은 이 운동에 대한 입장이 크게 갈려 있다. 이 연합 운동의 본질은 선교이다. 주님의 명령을 생각하면 에큐메니컬 운동이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선교만 중시한 채 교리에는 무관심하다면 결국 다른 복음,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전하는 상황이 발생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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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지역 교회를 사랑하는가? 케빈 드영 시리즈 2
케빈 드영.테드 클럭 지음, 이용중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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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라 부르는 것은 단지 하나의 건물일 뿐이고, 진정한 교회는 성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두 세 명의 성도가 모이면 그것이 곧 교회이므로 흔히 말하는 건물로써의 교회는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몇 명의 성도가 어디지든 모이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건물로써의 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그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100% 맞는 말도 아니다.

 

 '왜 우리는 지역 교회를 사랑하는가?'

 

 이 책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교회 반대론들자에 대한 일종의 교회 그 자체의 변증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케빈 드영이라는 미국 교회 목회자와 테드 클럭이라는 자유기고가(?)로 두 사람 모두 우리에게는 낯설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 책에서 하는 얘기는 상당히 의미가 있다. 
 내용은 두 저자의 글이 번갈아가며 담겨 있다. 케빈 드영은 (지역)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선교적인, 개인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신학적인 이유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케빈 드영이 형식을 갖춰 답을 하고 있다면 테드 클럭은 교회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경험 등을 통해 자유롭게 이야기 하고 있다.
 케빈 드영의 글을 통해 교회를 반대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반박들을 알고, 그에 대한 이해 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철저한 변증법적 과정이나 신학적 논의 형식으로 답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들과 비슷한 형식들 갖춰서, 논리적 과정을 통해 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거부하려 하지 않는 이상 케빈 드영의 답에 상당히 수긍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테드 클럭의 글은 간증 등의 자유 양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글이 약간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헷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그의 글은 케빈 드영의 글보다 부담이 적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테드 클럭의 글을 통해 교회에 대한 (일부 혹은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 평가가 어떠한지 알고, 지적 고민이 아닌 감정적 고민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두 형식의 글을 통해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지적 논리 과정을 통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감정적 고민을 통해서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두 형식의 글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잘 보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된다. 단점이라 지적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테드 클럭의 글은 자유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 하려는 바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떠한 면에서 케빈 드영의 글의 흐름을 깨뜨린다고 할 수도 있다. 좀 더 부정적으로 말하면 테드 클럭의 글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교회론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이가 있다면 두 사람의 글을 통해 혼란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담겨 있는 교회에 대한 반박과 혼란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하지만 종종 담겨 있는 바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즉 우리도 조금씩 교회론이 흔들리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분명히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한 바와 같이 성도 개개인이 곧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교회이다. 그렇다면 건물로써의 교회는 필요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간단히 말해서 성도들이 교회라 할지라도 어디선가 모여야 한다. 두 세 사람이든 십 수 명이든 모일 장소가 필요하다. 즉 한시적이든 계속적으로든 교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건물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여러 답을 할 수는 있지만 글이 길어질 것 같아 겸연쩍게도 더 이상의 답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성도의 몸으로 구성된 교회와 지역 교회는 둘 다 중요하다. 특히 지역 교회는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아무리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그 기능과 역할 면에서 필요하다. 유용하다. 물론 건물로써의 교회를 지니치게 치장하고, 확장 할 필요는 없다. 즉 건물에 지나치게 집착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거의 대부분 (지역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들의 바르지 않은 행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진정한 목적을 상실하고, 허튼데 집중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교회인 성도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교회인 지역 교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의 용도를 명확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론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앎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성도라는)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써의 본질적 기능과 역할을 다 할 것이다. 그때에는 단지 과시를 위한 하나의 건물, 우상으로서의 교회만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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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개척자 요한 칼빈 -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칼빈평전
정성구 지음 / 하늘기획(호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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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종교개혁자'하면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떠올릴 것이다. 중세 시대에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타락한 로마 카톨릭에 반하여 종교 개혁을 이끈 사람들은 그 둘 뿐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종교개혁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가장 주목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문을 두드렸다면 존 킬빈은 그것을 열었다고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할 의도는 없었지만 시대의 상황과 요구에 의해 그 포문을 열었다. 그 뒤 칼빈은 종교개혁에 탄력을 가져 왔다. 특히 칼빈은 그가 남긴 매우 유명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통해 개신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지난 2009년은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한 해 동안 칼빈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른 어느 해보다도 국내외에서 칼빈에 관한 많은 책이 출간 되었다. 칼빈의 신학을 분석하고, 그의 삶을 조망하는 등의 다양한 책이 출간 되었다.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 링크된 책 제목은 '개척자'로 되어 있는데 개'혁'자가 맞다. 
 
 이 책 또한 칼빈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책 중 하나이다. 원래는 기고문으로써 저자가 한 신문에 1년 간 기고한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따라서 내용은 1년 52주에 맞춰 52개의 장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 책은 칼빈의 신학을 면밀히 분석하는 책이 아니다. 그의 삶과 업적을 조망하는 평전이다. 내용 구성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눈에 띄는 특징이자 가장 큰 장점은 쉽고 재미 있다는게 아니다. 그것은 여러 장점 중 한 가지에 불과 할 뿐이다. 가장 큰 장점은 다른 책에서는 중요함에도 언급하지 않거나 짤막하게 이야기하고 지나치는 부분도 다른 내용과 같은 분량과 깊이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칼빈은 기독교 강요 외에 주석으로 유명하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 '칼빈' 하면 탁월한 신학자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신학적 업적은 뛰어나다. 그런데 그에 못지 않게 칼빈은 강해 설교도 뛰어나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제네바 대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고, 교수로서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또한 그는 그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마친 후 각자의 고향이나 활동지로 돌아가 사역을 할 수 있게 하는, 선교사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즉 이 책은 위대한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목회자요, 교사요, 선교사요, 그리고 정치가요, 기도자로서의 칼빈. 그런 그의 다양하고, 왕성한 활동과 업적을 골고루 조망하는 것은 물론 그는 매우 병약했던 사람이라는 인간적인 면까지 두루 살펴본다는 점에서 매우 큰 장점과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큰 장점과 함께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수차례 언급하는 내용이 꽤 많다는 점이다. 특별히 중요한 내용일 경우 한 두 번 혹은 두 세 번 언급 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 언급하면 잔소리가 되어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줄어든다 -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 는 점을 감안하면 내용을 좀 다듬었다면 더 좋았을 성 싶다. 한 번에 쓴 글이 아니라 장시간, 서로 다른 시간에 쓴 기고문을 엮은 것이라지만 책으로 묶을 때 좀더 신경을 써서 편집을 했으면 되는데라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그것은 글을 읽는데 크게 방해가 되는 단점이 아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칼빈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물론 그를 통해 자신의 삶에 큰 도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종교개혁기와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개신교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귀중한 자산을 남겨 많은 이들이 신앙의 빛을 잃지 않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선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그를 비난한다. 그가 평생을 머문 스위스 제네바시를 이상적인 도시로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진 마찰과 그의 반대자들을 냉혹하게 처형한 것은 그에 대한 신랄한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은 대개 그저 악의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칼빈이 처한 당시의 상황과 그의 신념을 이해하지 못한, 이해하길 원하지도 않는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이다. 물론 칼빈의 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미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가 처한 상황과 입장을 충분히 알고 이해한 다음 그의 행동을 평가해야 공정하고, 누구라도 (어느정도) 수긍 할 수 있을 것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지금 이 시대도 칼빈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간절히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칼빈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많은 좋은 것을 배울 수는 있다. 부디 많은 이들이 칼빈으로부터 - 그렇다고 칼빈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아닌 - 좋은 것을 취하여 그 가운데서 이 시대의 불의와 악을 멸하고, 선한 빛을 비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탄생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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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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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셨다. 그러곤 말씀하셨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말이다. 아마도 아브람은 이 말씀이 상당히 기가 막히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다며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고향에서 나름 잘 살고 있었을텐데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라니! 연고도 전혀 없고, 어딘지 조차 모르는 아무 곳으로 말이다! 게다가 떠날 당시 그의 나이는 칠십오세(창 12:4)였다! 이 얼마나 청천변력 같은 말이었을까!? 젊은이도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게 쉽지 않은데 노인인 아브람은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아무 말 없이 모든 소유와 식솔들을 데리고 떠났다. 단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창 12:2)" 하시겠다는 말씀 하나만 믿고 말이다. 정말 큰 믿음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그분은 진정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약속, 즉 계약은 아브라함이 처음은 아니다. 그 시작은 최초의 인류인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어 노아, 모세, 다윗까지 계속된다. 하나님의 계약은 크게 창조와 구속으로 구분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류의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대단원의 역사를 관통한다.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이 책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약을 분석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계약을 다룬다. 그것의 속성, 범위 등 하나님의 계약의 맥을 짚는다. 이어서 계약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창조와 구속의 계약을 분석한다. 특히 구속의 계약에서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 및 그리스도의 계약에 특별한 주제를 부여하여 상세히 살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성경, 곧 구'약'과 신'약'의 전체적인 맥을 짚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책의 관계를 알고, 성경의 핵심을 좀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약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인류와 어떻게,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신앙의 축복을 더욱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다. 일방적인 그것은 어찌보면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본다면 은혜로 보일 것이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 계획은 하나님의 자비이자 사랑이다. 따라서 그분의 계약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창조와 구속의 계약, 인간을 위한 그 계약을 온전히 이해하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나아갈 바와 행할 바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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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 - 그의 삶, 그의 세계 세계 영성의 거장 시리즈 3
더글라스 길버트 & 클라이드 S. 킬비 엮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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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회심한 후 처음 접한 기독교 서적은 바로 C. S. 루이스의 전기였다. - 아직도 내 책장에 꽂혀 있다. - 어떻게 그 책을 접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 아마 인터넷 광고를 통해서였던 것 같다. - 그 책에서 만난 루이스는 참으로 동경 할 만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삶과 사상에 매료 되었다. 자신의 삶과 기독교에 열성을 보이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특히나 그때 나는 막 회심한 상태였기에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때문에 또한 타오르는 열성을 가진 루이스에게 깊이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읽은 루이스 전기는 글자만 있었다. 표지에 루이스의 얼굴이 있긴 하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었다. 사진도 몇 장 있었으면 루이스를 알고, 마음으로 느끼기에 좋았을텐데 싶었다.

 

 'C. S. 루이스 - 그의 삶, 그의 세계'

 

 이 책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뒤 만나게 된 루이스의 또다른 전기이다. 루이스의 첫 전기를 만난 이후 국내에 출간된 루이스의 책을 모조리 구입하여 그와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다. 그런데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루이스의 책들에 실린 동일한 초상 외에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스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매번 본 얼굴 외에 다른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이 책에는 루이스의 다양한 사진이 실려 있다. 물론 루이스에 관해, 그의 어린 시절과 교수 시절 등에 대해서도 담겨 있다. 사진과 글이 어우러져 루이스에 대해 더 생생히, 그리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알 수 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루이스 외에 주변 인물이나 풍경 사진은 많은데 정작 루이스의 자신의 사진은 적다는 것이다. 또한 내용적으로는 그의 신앙에 대한 언급이 적다는 점이다. 루이스의 평소의 삶의 모습은 담겨 있지만 어떻게 신앙 생활 했는지는 담겨 있지 않기에 아쉬움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단점이 크게 느껴지는 책이긴 하지만 어쨌든 루이스와 그의 삶을 다시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가움이 든다.

 

 나는 루이스로 인해 결심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 또한 그와 같이 책을 열심히 읽겠다는 것이었다. 그 전부터도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형편상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든 책을 내 영의 양식으로 삶고, 닥치는 대로 읽겠다고 결심 했다. 또한 나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 했다. 기독교를 열심히 변증하는 루이스의 모습은 큰 도전이 되었다. 그 모습으로 인해 나도 하나님을 전하는데 열심을 보여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반은 잘 실행하고 있고, 나머지 반은 신통치 않다. 그래도 내 삶은 계속 진행 중이기에, - 사고 없이 아프지 않고 살다 하나님께 간다면 - 산 날보다 살 날이 몇 배는 더 많기에 남은 시간 동안 두 가지 결심을 더욱 충실히 이루어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면 나는 루이스에게 빚진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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