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 - 신앙의 빛으로 우주를 신비를 밝히다
성영은 지음 / 성약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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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플러, 내가 들어본 이 이름은 우주 망원경을 통해서다. 그것을 통해 케플러는 천문학자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했다. 그게 전부이다.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등 그에 관해서 따로 들어본 적이 전혀 없다. 과학 시간에 졸았는지 그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이라는 것을 들어본 기억도 없다. 내 기억으로 그와 나는 일면식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 우연찮게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케플러,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신비를 밝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케플러를 처음 만났다. 내가 만난 케플러, 이 책에 담긴 그를 정리하면 이렇다.

 

 케플러는 말하자면 과학자인 동시에 평신도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루터와 칼빈 등 1세대 종교 개혁자들이 생을 마감한 후 그 다음 시대에 활동한 과학자이다. 케플러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 학교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하며 집중적으로 종교교육을 받았다. 케플러는 집안 내력과 그가 받은 교육으로 인해 목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학 교육의 마지막 과정을 남겨두고 뜻하지 않게 당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수학 교사가 되었다. 그는 교사는 잠시일 뿐 꼭 목사가 될 것이라 다짐 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인생은 다짐과 다른 방향으로 향하였다. 하나님은 그를 다른 길로 이끄셨다.
 케플러는 신교도로서 구교도 세력의 압력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구교도 세력으로부터 개종하라는 압력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리고 성찬식과 관련해 칼빈의 해석이 더 성경적이라 여기며 그것을 고수하자 다른 신교도인 루터교도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 두 가지로 인해 케플러는 늘 손해를 보고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는 내외부로부터 동시에 압력을 받았지만 양자를 상대로 한 자신의 신념을 죽는 그 순간까지도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동시에 자신의 연구에 매진한 케플러는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더욱 발전시키는 과학적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는 비록 목회자가 아닌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신앙의 빛 안에서 매순간,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다.

 

 이 책에는 일반에 알려진 과학자로서의 케플러는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신앙인으로서의 그의 삶과 신앙이 담겨 있다. 그의 놀라운 과학적 쾌거와 함께 굳건한 신앙의 지조(志操)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지킨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그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열정을 어떻게 불태웠는지를 생생히 볼 수 있다.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그가 자신의 전(全) 삶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높여드렸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큰 도전을 받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케플러가 보여준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 일반 학문(오늘날 과학과 신학은 전혀 다른 분야이다. 하지만 당시에 과학은 신학에 종속 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관점으로 본다면 과학을 오늘처럼 일반 학문이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을 하며 일반 사회에 머물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모습,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그의 신앙의 절개 등 평신도로서의 그의 삶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성도들은 같은 평신도로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시 중세 유럽의 생활과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각 독자들의 삶의 현장과 케플러가 매진했던 분야는 다르겠지만, 그의 삶과 신앙을 통해 독자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높여 드려야 하는지 방향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평신도로서 이 세상에서 사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에 도전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읽어 볼 것을 자신 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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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신비주의와 이머징 교회의 도전 잘못된 기독교 분별 시리즈 8
게리 길리 지음, 김세민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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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의 현재 상황을 사자성어에 빗대면 '오리무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한국 교회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는커녕 욕되게 하고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은커녕 이 사회에서 지독한 악의 축이 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는 서로 티격태격하며 각종 비리와 분열로 얼룩져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른다.

 이것은 외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내적인 모습에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잘못된 영성과 실용주의 등에 빠져 참다운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교회에 들어와 성경보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내부가 썩어 있으니 외향도 썩을 수밖에.

 

 '포스트모던 신비주의와 이머징교회의 도전'

 

 이 책은 오늘날 교회 내에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사상과 그 추구를 고발하고 있다.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사항을 정리하면 포스트모더니즘, 교회 권징, 성경의 오용, 성경의 왜곡, 신비주의, 이머징 교회 등이다. 이 시대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잘못된 사상과 비뚤어져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어떻게 무너져 가고 있는지 그 잘못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교회가 이 시대의 사상에 어떻게 물들어 가고 있고, 세상의 영적 흐름에 어떻게 지배 당하고 있는지 알리고, 경고한다. 그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미국 교회의 현실을 대변한다. 유럽이나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등 다른 대륙의 교회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안타깝지만 유럽 교회는 이미 대부분 배도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책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남미나 아프리카의 교회는 한창 신앙으로 타오르고 있어 아직은 무관하다. 아시아의 교회는 눈에 띄지 않게 전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슬픈 현실이지만 단 한 곳,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와 함께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담긴 교회의 여러 잘못된 모습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도 해당한다. 그렇기에 한국 교회의 목회자, 성도, 신학생, 신학자는 이 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잘못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책을 통해 현실을 직시 할 필요가 있다. 배교와 배도의 길목에 들어 서 있는 한국 교회는 멸망하지 않으려면 문제의 심각성과 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부디 이 책을 통하여 심각하게 느끼고, 바른 길로 돌아서길 바란다.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배교와 배도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는가? 한국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각종 신비주의 영성과 실용주의, 그리고 각종 비리와 분열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총체적인 문제는 한국 교회가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이것은 조금 더 악화될 경우 배교, 배도 할 수 있다는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지금 각종 더러운 얼룩으로 물들어 있다. 외부적으로는 물론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떠안고 있다. 외적인 문제는 내적으로 거룩함을 상실 하고, 말씀 위에 온전히 서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인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언젠가부터 미국의 잘못된 영성과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 했다. 미국의 것은 모두 좋은 것인 줄 알고 아무거나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기독교 초기 선교의 특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는 미국 선교사들의 전도로 진리를 전해 받고, 그들의 교육을 통해 성장했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여전히 미국 교회의 영향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다. 좋은 것은 물론 분별이 필요한 잘못된 것 마저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한국 교회에도 미국 교회에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각종 내적 문제가 그대로 발생하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그 문제를 고치려 하기보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기우와 호들갑으로 치부하고 있다. 귀담아 듣기보다 뭐가 문제냐며 역정을 내며 귀를 막는다. 한국 교회가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는 것인지 걱정이 된다. 지금 돌이키지 않고 계속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한국 교회는 언젠가 그분의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전에 그분이 싫어하시는 각종 죄를 짓고 있는 한국 교회는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거룩함으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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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장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비교신학 시리즈 2
엘머 타운스 지음, 김석원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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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한국 교회는 교회성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 세계에서 외형적으로 가장 큰 교회 10개 중에 6개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그 교회들이 지금과 같이 성장한 원인을 전적으로 교회성장에 매진한 결과라고 할 수만은 없다. 어떠한 모양과 방법으로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리라. 어쨌든 명백한 사실은 많은 교회들이 양적 성장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크기가 곧 목회자의 능력 및 목회 성공 여부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교회의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및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소외와 허탈감이 심화되고 있다.

 본래 교회성장은 선교를 목적으로 시작 되었다. 미국의 선교사인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은 1923년,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선교회 선교사로 인도에 파송되었다. 인도 선교 중에 그는 자기 교단의 교회는 저성장을 보이는데 인도 내 다른 지역에서는 큰 부흥이 일어난 것을 보고, 어떻게 그러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이것을 계기로 시작된 연구가 교회성장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교회성장 운동은 본래 선교에 적용시키기 위해 발흥 하였지만, 맥가브란의 교회성장 운동에 동참하게 된 풀러 신학교 세계 선교대학원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등에 의해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교회성장 운동은 종래의 국제 선교에 초점을 둔 부류와 함께 미국 내의 교회성장에 초점을 둔, 두 부류로 발전을 한다.

 

 '교회성장 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책은 여전히 진행 중인 교회성장 운동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함께 논의하는 책이다. 5명의 논찬자가 서로 다른 관점으로 교회성장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다. '효과적인 전도 방법론적 관점', '복음과 문화 사이의 대화적 관점', '중도적 관점', '개혁주의적 관점', '갱신주의적 관점', 이렇게 5가지 관점에서 교회성장 운동의 이점과 문제는 뭐가 있는지 각각 주장을 하고, 서로 간에 피드백을 제공한다.

 각각의 관점에 대해 (편집자의 말을 빌어)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효과적인 전도 방법론적 관점'은 "교회성장 운동을 복음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문화 속으로 침투하는 전략이라고 본다." '복음과 문화 사이의 대화적 관점'은 "교회성장 운동이 교회론에 대한 문제 때문에 현대 문화를 효과적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도적 관점'은 "교회성장 운동이 전도에 초점을 맞췄을 뿐 실제로는 선교학의 한 가지라고 보는 관점이다." '개혁주의적 관점'은 "교회성장 운동도 나름대로 신학 체계가 있지만, 문화를 분석하고 필요한 전략을 만들고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갱신주의적 관점'은 "교회성장 운동이 바로 서려면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공동체로서 회복하라는 성경적 비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이처럼 5가지 관점은 서로 그 의견이 다른데, 문제는 의견이 다르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얘기하는 대상과 초점이 다르다는 데 있다. 어느 논찬자는 주로 국제 선교 초점을 둔 교회성장 운동에, 그리고 또 어느 논찬자는 국내 교회성장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의견을 제시한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일관된 흐름을 잡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 된다. (비록 교회성장 운동은 서두에서 개략적으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로 발전하였지만) 5명 모두가 둘 다를 다루거나 아니면 국제 혹은 국내 교회성장 운동 중 어느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어 의견을 나누었다면 독자들이 이해하고, 흐름을 잡기 더 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본인이 이해한 교회성장 운동은 이렇다. 먼저 교회성장 운동에 대한 오해가 크다. 일반적으로 '교회성장 운동' 하면 오직 수적 성장에만 매진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비판을 한다. 교회성장 운동에 대해 명확히 알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드러난 모습을 보며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하곤 한다. 맥가브란이 구상한 교회성장 운동은 그렇지 않다. 그가 추구한 교회성장 운동의 기본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보편적 원리를 찾아 그것을 선교에 적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있다. 성경적인 바른 원리가 적용된다면 교회는 성장하는 게 정상이라고 보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수적 성장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 뿐이지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회성장을 비판하는 이들은 대개 신학자이다. 그들은 교회성장 운동은 분명한 신학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즉, 그들은 현장의 사정은 잘 모르는 이론가들이라는 데서 아쉬움이 있다. 교회성장 운동은 현장의 경험을 통해 개발 되었다. 신학이 먼저가 아니라 현장이 먼저이다. 다시 말해서 시시각각 변하고, 많은 난관이 상존하는 현장에 대응하기 위해 탄생하였다. 물론 신학을 기반으로 도출한 바른 원리를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 연구를 통해 바른 원리를 찾아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현장에 대한 발빠른 대응이 어렵다. 그렇기에 (본인이 이해한 것이 맞다면) 맥가브란은 성경을 기본으로 하되 현장 분석과 적용을 우선하여 교회성장 운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성장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가장 먼저 또 다시 기본을 지적 할 수밖에 없다. 교회성장 운동은 과학적 방법 즉,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원리를 사회과학적 분석 방법을 통해 현장으로부터 얻어낸다. 이는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문제로, 기독교의 모든 활동의 기본은 성경 안에서 얻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예외가 있다면 성경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기 때문에 말해주지 않는 나머지는 다른 방법으로 얻는 것이 허용된다. 단, 이때에도 반드시 성경으로 검증 받아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교회성장 운동은 성경을 살펴보되 단지 참고용으로만 이용하고 주된 수단으로 현장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양자 간에 팽팽한 의견 대립이 이어진다.

 이에 더하여 교회성장 운동은 현장에 대한 분석과 적용을 중시한다. 때문에 성경을 살펴보기는 하지만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방법을 검증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법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성경을 오용하곤 한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지적되는 현장 중시에 따른 신학 부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문제는 교회성장 운동이 바르게 나아가기 위해 그 주창자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국제 선교에 초점을 맞춘 교회성장과 국내에 초점을 맞춘 교회성장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교회성장 운동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바와 같이 수적 성장이라는 한 쪽으로 치우친, 오류가 있는 발전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은 그 운동의 폐기와 교회에 상처를 남기는, 모두에게 이롭지 못한 결과만 낳을 것이다.

 

 교회가 성경 말씀을 제대로 따른다면 '교회의 성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현실은 그와 양상이 다르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그 결과는 말씀을 잘 따랐기에 발생한 자연스러운 '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어떠한 인위적인 방법을 통한 '교회성장'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많은 교회들이 더욱 성경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대형교회의 성공 비법을 전수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소위 '잘 되는 교회'가 ‘이 프로그램’을 해서 '성장 했다'고 소문이 나면 그 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해 많은 교회가 앞 다투어 달려든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적용해서 그것을 시행한 원 교회만큼 잘 되고, 성장 했다는 교회는 보기 드물다. 아니 아예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 프로그램이 성경적으로 옳고, 바른 프로그램이라면 다른 교회도 그것을 적용 했을 때 성장해야 정상이다. 그렇지 않고 그 프로그램을 처음 시행한, 단 한 교회만 성장 했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라고 속단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보편적으로 적용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은 마치 상위 1%의 아이들의 공부 비법을 배워서 서울대에 자식을 보내겠다고 부산을 떠는 학부모들과 같이 처절하게 뛰어 다닌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안타까움은 금할 수 없다.

 '교회의 성장'은 억지로 추구하지 않아도 성경적인 바른 삶을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성경 말씀을 따라 교회와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섰을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반대로 일부러 '교회성장'을 추구하면 당장은 성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성장은 결국 오늘날 대형 교회들이 보여주는 각종 비리와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같이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말씀 추구에 따른 내적인 성결이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커도 썩은 고목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도리어 썩은 고목이 좋다고 하니, 미국에서 들여온 곰팡이가 핀 썩은 빵을 사대주의에 빠져 마치 갓 구운 신선한 빵인 줄 알고 무조건 먹으려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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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찬양 MLJ 시리즈 4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이태복 옮김 / 지평서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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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에서도 언제부턴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빠른 템포와 세련된 멜로디를 큰 특징으로 한 그것은 특히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며 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고 그것은 어느 순간 교회의 안방이자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공예배, 대예배에까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각종 악기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며 오랜 시간에 걸쳐 예배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과 대조적으로 CCM은 매우 빠른 속도로 예배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CCM에 대한 명확하고, 일치된 정의가 필요하지만 가끔 워십송도 포함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CCM은 또다른 말로 찬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그것이 과연 찬양으로써 합당한지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멜로디와 악기, 그리고 그 가사, 즉 CCM의 모든 면에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럼에도 젊은 이들은 깊은 숙고 없이 그것에 여전히 열렬히 환호하고 있는 반면 일각에서는 비성격적이라며 예배에서 불려지는 것을 반대하기도 한다. CCM은 정말 찬양으로써 적합하지 않은 것일까?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는 찬양을 어떻게 말하고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적 찬양'

 

 이 책은 마지막 청교도,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탁월한 복음주의자 등으로 불리우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찬양에 대한 설교이다. 정확하게는 에베소서 5장 18-20절에 관한 네 편의 설교로, 로이드 존스는 네 편의 설교를 통해 성경적 찬양에 대한 분별력을 제공한다.

 CCM은 1960년 대에 미국에서 일어나 전 세계로 확산 되었다. 아마도 로이드 존스 목사의 생존 당시(1981년 사망)에 영국에서도 그것이 유행하여 교회에서 널리 불려졌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러한 찬양 일반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거부감이 깊이 베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아름다운 곡조가 있고, 아름다운 형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노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내는 모든 예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단순히 기교를 추구하는 것은 지성이 모자라고 마음이 완고하며 차가운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63p)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노래의 아름다운 곡조는 결코 진부하지 않고 경박하지도 않으며, 화려하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안흡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 신앙과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곡조와도 어울리지 않습니다."(65p)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찬송은 반드시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어울려야 하며,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찬송 형식은 반드시 우리가 찬송하는 대상인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가사를 경박한 곡에 붙여서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66p)

 

 당시에 유행하던 찬양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거부감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상당히 강하게 부정한다.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설교 목적은 당시의 찬양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아니라 찬양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 성경적 찬양이란 무엇인지 깊고 바른 통찰력과 이해를 제공한다.

 따라서 오늘날 CCM에 열광하는 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거부감이 일 수도 있다. 그의 설교가 그들에게는 너무 통렬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물론 오늘에도 해당되는 찬양 일반에 대한 적실한 그의 지적은 아마 CCM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분명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저급하고, 비성경적인 가사가 담긴 찬양 아닌 찬양들이 늘어가고, 그것들을 무분별하게 부르는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의 가르침에 더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바른 안목을 통해 하나님께 올바른 찬양을 올려 드리기 위해서는 찬양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찬양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적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로이드 존스가 지적한 싱코페이션과 색소폰 사용 등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마음을 열고 논의 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나머지 찬양 전반에 대한 가르침과 지적은 충분히 공감이 가고, 분명히 옳기에 그것을 실제, 예배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답은 자명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그것과 꽤 멀어져 있기에 우리는 다시금 진부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찬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행하신 일들에 감사하는 것이다.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성육신하신 주님께 감동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충만으로 아버지와 그 아들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눈이 많이 어두워져 이러한 성경적 찬양에서 꽤 많이 벗어나 있다. 세상적인 것들이 교회에 침투해서 말씀은 물론 찬양마저 변질시켜 놓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나의 감동을 위해 노래한다. 입술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지만 실은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 그 환각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고 그에 대한 성령님의 증거를 노래해야 한다.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과 그 사랑을 입술로 노래하며 영광을 드려야 한다. 찬양이 교회와 예배 가운데서 온전한 위치와 내용을 회복 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메스를 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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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임재 연습 월드 클래식 시리즈 2
로렌스 형제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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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스 형제의 이 책은 이미 읽은 책이다. 다른 출판사의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미발굴 원고가 포함되어 있다는 광고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로렌스 형제는 어느 날 한국 교회에 이름이 알려져 갑작스레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는 17세기 프랑스의 수도사로, 하나님의 성품을 담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위해 적극 수련한 사람이다. 다른 이들과 차별화 된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추구했다. 일상 생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매순간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분을 더욱 느끼고, 섬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로렌스 형제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한 영감을 주었고,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로렌스 형제는 신비주의자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하는 신비주의 영성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결코 경험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로렌스 형제와 같이 임재를 연습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내 편에서 무작정 원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특별계시의 완성된 이후에 그분은 구약과 같이 자신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드러내시지 않는다. 대신 그분은 오직 예배와 성경과 세례와 성찬을 통해 자신을 경험하게 해 주신다. 우리는 오직 (세례와 성찬을 포함한) 예배와 성경말씀, 그리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다. 로렌스 형제와 같은 신비주의자가 추구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그분을 경험 할 수도, 알 수도 없다. 그것은 헛된 방법이다. 혹 그러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 했다면, 그것은 다른 신(神)이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분이 정해주신 앞서의 방법들을 통해서만 경험 할 수 있다.

 

 물론 로렌스 형제 등의 신비주의자들에게서도 배울점은 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 갈망과 열심은 분명히 본받을 만하다. 그런 그의 열망과 노력은 순수하지만 방법이 잘못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로렌스 형제가 보여준 잘못된 방법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잘못된 방법을 추구하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대신 우리는 로렌스 형제의 열심은 배우되 정통 기독교가 제시하는 바른 방법 안에서 그분을 향한 열심을 추구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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