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운동과 성령 세례
변종길 지음 / 말씀사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은사 등에 대해 신학자들 간에 뜨거운 논쟁이 오가고 있다. 물론 그 논쟁의 열기가 지금은 사그라든 듯 하지만, 어쨌든 그 논쟁은 여전히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있다. 두 대립각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못하고 있다. 서로 간에 초점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의 의견이 맞는지 당장에는 결론이 나지 않을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를 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쏟으려면 신학적 난제들을 풀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을 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견해를 바탕으로 신앙생활 계속 해나갈 것이다. 각자의 견해가 신앙에 치명적인 독이 되지 않는 한 서로의 견해를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그렇다 하여도 우리는 성도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편을 택하는게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오순절 운동과 성령 세례'

 

 본서는 성령론 중에서 참으로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는 부분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에 발생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순절 운동, 그것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성령 세례를 논하고 있다.

 

 본문은 총 2부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다루고 2부에서는 오순절 사건과 성령 세례를 다룬다. 먼저 1부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면, 오순절 운동의 핵심은 '성령 세례'에 있고, 특히 '회심 후 체험'으로서의 '성령의 세례'를 강조한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이러한 오순절 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을 유보한다. 그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대신 저자는 오순절 운동을 평가할 때 '교리'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온전한 평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앙생활은 교리만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신앙생활은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가깝고도 밀접한 관계에서 오는 '풍성한 생명'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이 교리 부분에 있어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이 치명적이지 않다면, 그들이 열심히 기도하며 풍성하고 능력 있는 영적 생명을 누린다면 그것대로 인정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교리에 있어서도 치우치지 않고 생명에 있어서도 부족하지 않은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기에 본서에서 교리만 평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이해를 구한다.(25, 26p)

 이어서 저자는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조사한다. 간략히 정리하면, 18세기에 웨슬리로부터 발생한 메소디즘에서 기원하여 19세기 찰스 피니로부터의 부흥 운동, 그리고 R. A. 토리의 성결운동, 마지막으로 20세기의 오순절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분석한다. 여기에 1950년대에, 오순절교단을 뛰어 넘어 비오순절 교회로까지 퍼지게 되는 신오순절 운동의 출현을 더한다.

 

 다음 2부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과 전통적 교회의 견해를 비교 분석하며 그 대립의 해결을 찾는다. 먼저 저자는 오순절주의자들과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 사건에서 제자들은 그 전에 중생한 것이 분명하므로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에게 있어 '두 번째 체험'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는 '회심과는 구별되며 보통 회심 후에 일어나는 체험'이라는 주장을 한다고 한다. 반대로 전통적인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구속사적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두 번째 체험'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첫 번째 사건'으로 보려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 문제제기를 한다. 전통적인 교회는 오순절 사건 전에 제자들이 중생한 것에는 동의하는데, 그렇다면 오순절 사건에서 제자들이 받은 성령 세례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하지 않는 문제를 지적한다.

 이상의 대립과 문제에 대해 저자는 나름의 견해와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선 저자는 기본적으로 오순절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는 전통적인 견해가 옳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지적한 문제, 오순절 사건 전에 중생한 제자들이 오순절 사건에서 받은 성령 세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안한 말이지만 본 평에서는 그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을 적지 않겠다. 그것까지 적는다면 다른 독자들이 본서를 읽을 맛이 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서는 성령론 문제에 있어 특히 '성령 세례'에 집중하여 분석을 시도하고, 답을 찾아 나간다. 그런데, 성령 세례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책은 이미 국내에 여러 권 출간 되어 있다. 그 책들을 다 읽었다면 본서는 별 흥미를 자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서는 다른 책들이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은 부분(위에서 답을 생략한 저자가 지적한 문제)을 다루고 있기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저자가 특별히 지적한 문제에 대해 다른 책들은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으나 '성령 세례'를 풀어가는 맥락 속에서 자연스레 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본서의 토대가 되는 저자의 논문이 나온 시기는 꽤 지났기 때문에, 이미 그 부분에 대한 답을 구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문제를 보다 구체화 시켰기 때문에 본서를 통해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직접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령 세레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읽어볼 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 평을 마무리 하기 전에 성령 세례에 대한 본인의 관점을 제시함으로 한쪽 견해를 소개하고 싶다. 전통적인 견해로, 성령 세례는 신자의 중생 때 함께 받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중생과 동시에 성령 세례를 받게 된다. 따라서 중생한 이후에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노력 할 필요가 없다.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이라는 가시적 은사(방언에 대한 견해차도 조율 할 필요가 있지만)가 성령 세례의 증거이기 때문에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오순절주의자들이 아직도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하는 것은 헛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음에도, 그 증거가 방언이라는 잘못된 주장에 따라 그것을 받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쓰려 한다면 어서 생각을 바꾸고 그 시간에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게 그분과 본인에게 훨씬 더 유익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놀란사자 2022-05-0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매 전에 많은 도움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 Covenants: God's Way with his People
O. Palmer Robertson 지음, 오광만 옮김 / 그리심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시겠다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언약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렇다면 언약이란 무엇일까?

 

 '언약이란 무엇인가'

 

 본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언약을 다룬다. 언약이란 무엇인지, 언약의 대상, 언약의 내용, 언약의 방법 등 언약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주고 있다. 본문은 총 13장으로 일견 많아 보이지만, 각 장의 분량은 많지 않아서 읽는데 부담이 없다.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이해가 쉽다. 각 장의 마지막에는 복습을 위한 질문과 토의를 위한 질문이 있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된다. 다만 본서는 앞서 말했듯이 각 장의 분량이 적고, 내용이 쉽다는 점이 큰 장점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언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면, 먼저 본서를 읽고 기초를 쌓은 후 동저자의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덤브렐의 '언약과 창조',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 클라인의 '언약' 등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런데 그 언약은 단지 한 사람으로 그치는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넘어 가정과 족속, 나아가 모든 인류에게로 뻗어 나간다. 그 언약은 그저 약속된 이와 약속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모든 사람과 세대가 원하는 세속적이고 근시안적인 물질적 부나 건강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이들에게 그러한 것들도 주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신 약속은 그러한 차원을 넘어선다. 그 약속에는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과분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시작으로, 그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도록 하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꽃을 피운다. 하나님께서는 멸망에 처한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다. 종국의 날에 영원한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시기로 말이다. 그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 택하신 자들을 지키시며 돌보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약속에 감사하고 그 약속을 늘 되새기며, 그 약속이 성취될 날을 믿음과 인내로 기다려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1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1
최낙재 지음 / 성약출판사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인간은 구원 받았다. 무엇으로부터? 바로 우리의 죄로부터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그로 말미암아 멸망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은 것은 아니다. 누구나 구원 받지는 않는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만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은 혹자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나보고 죄인이라니!'

 '나는 죄인이 아닌데 멸망에 처해야 한다니!'

 아마도 누군가는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위에 말은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구원에, 또 어떤 이는 멸망에 처해질 것이다.

 어떤 이는 이미 구원 받았고, 구원 받아가며 지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가운데 마침내 구원 받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앞으로 그리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또 앞으로 임할 것이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며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되다.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본서는 제목대로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구원 받음에 대하여, 구원의 목적과 구원의 복, 구원 경륜의 목표 등 구원과 관련된 사랑들을 잘 알려주고 있다.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말씀들을 충실히 강설함으로 구원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하여 바르게 가르친다. 따라서 본서를 통해 구원의 의미와 내용을 바로 알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하여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허망한 것은 사람의 인생이다. 인생은 그 자체로는 허망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락하여 그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간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나의 만족만으로 추구하며 살아간다. 물론 외견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이 뭐가 잘못 되었느냐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타락하였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악하다. 이 말은, 인간은 나의 욕심과 만족을 위해 반드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고, 또 입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의도 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간은 그 자신을 위해 살다보면 타인에게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어떠한 사람은 타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기도 한다. 일견 그러한 인생은 숭고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도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은 가치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온전하지 못하다.

 우리 삶이 가치가 있으려면, 오직 구원 받고 그 은혜를 누리며 감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각자의 사명을 다할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만 가치를 발한다. 누군가는 이것이 이해되지 않고, 동의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살 때에만 그 인생이 가치가 있으며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혁해 가는 교회
허순길 지음 / 총회출판부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모토는 성경 말씀만 따르려는 그들의 확고한 의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부패하고 성경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진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 그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한 종교개혁자들. 그들의 개혁은 성경으로 향한 교회의 개혁이었다. 그 개혁은 16세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5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으로의 회귀 운동이다.

 종교개혁으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 종교개혁자들의 목숨과 맞바꾸어 탄생하게 된 개신교회는 그들의 숭고한 의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심각한 부패와 오류를 시정한 개혁자들의 뜻에 반하여 개신교회는 다시금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과 같이 잘못된 것들을 쫓고 있다. 개혁은 커녕 점점 더 부패하고 있다. 그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무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

 

 '개혁해 가는 교회'

 

 본서는 십수 년 전에 저자가 기독교보라는 고신교단지에 실었던 글들을 모아 발간한 책이다. 본서의 내용은 크게 본다면 교회론을 다루고 있다. 총 5부로 되어 있는 본문을 각 부분별로 살펴보면, 1부는 교회에 대하여 다룬다. 장로교회의 특성, 성례, 권징 등을 말한다. 2부에서는 교회와 직분을 다룬다. 장로에대하여, 집사에 대하여 , 직분에 대하여, 그리고 축도 등을 다룬다. 3부에서는 교회 생활을 다룬다. 예배 찬송에 대하여, 취임식, 설교와 강론의 정의, 성찬예식, 교회가 교육 사역이나 사회 사업을 할 수 있는지 등을 논한다. 4부에서는 교회와 관련된 여러 풍조, 이를테면 목사 청빙 문제, 총회회관이라는 명칭의 타당성, 치유집회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 등을 살펴본다. 마지막 5부에서는 서로 다른 9가지 주제에 대한 저자의 논설이다.

 본서의 내용은 주로 고신교단과 관련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고신교단에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다. 타교단, 개신교회 모두에 해당 되고,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물론 교단에 따라 본서의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내용도 있을 것이다. 교단에 따라 적용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의견을 달리하는 내용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많은 내용이 교단을 떠나 누구나 공감하고 함께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일 것이다.

 본서를 통해 교회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비록 십수 년 전에 쓴 글들이지만 증보에 증보를 거듭하여 그 내용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떠한 문제는 글이 씌어졌을 때나 지금이나 나아진 게 없어서 씁쓸하기까지 하다. 아무튼 본서를 바탕으로 진정한 교회됨은 어떠한 것인지 고민하고, 그 고민들을 교회의 개혁을 위한 노력의 발판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개혁은 결코 막연하지 않다. 그 개혁은 분명한 목적과 그림이 있다. 그 목적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그림은 성경이 보여주는대로 최대한 닮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하고 모범을 보인대로 직분의 역할을 바로 세우며, 참교회의 표지를 온전히 지키고, 성도에 대한 교육, 그리고 예배당의 모습과 예배의 형태 등 교회 안팎의 모든 부분을 개혁하는 것이다. 성경과 다른 부분,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는대로만 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혹자의 말처럼 성경을 절대시 하는게 아닌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절대시 하는게 절대로 아니다. 성경 그 자체를 신성시 하는게 아니다. 성경 안에 담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그 말씀을 신뢰하기 위한 방법이다. 교회는 성경 안에 담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며 그 말씀을 반석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그 말씀대로만 행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다.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가 있고 말씀이 있는게 아니다. 교회는 말씀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따라서 교회는 당연히 말씀을 따라야 한다. 교회는 말씀 위에 서서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됨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말씀을 벗어난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교회는 말씀을 바탕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점을 기억한다면, 교회는 말씀에 비추어 말씀대로 항상 개혁해 가야 한다는 그 모토는 더 이상 내세울 필요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걸, 도리어 그것을 주장함은 - 당연한 일임에도 그렇지 못하기에 -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르트 신조 강해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교리에 대한 위대한 신앙고백 개혁주의 신앙고백 시리즈 1
코르넬리스 프롱크 지음, 황준호 옮김, 김병훈 감수 / 그책의사람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진리에 무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단 하나의 절대 진리를 거부한다. 상대적 진리를 부르짖는다. 네가 가진 생각만 참이 아니라, 내가 가진 생각도 참이라고 말한다. 이는 진리에 대한 심각한 무지다. 진리에 있어 상대적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진리는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아도 똑같이 보인다. 이렇게 봤을 때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봤을 때 저렇게 보이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물론 장님과 코끼리와 관련된 예화와 같이 만지는 사람에 따라 진리를 다르게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해석자가 잘못 해석 했을 따름이지 진리가 변했기 때문은 아니다. 진리가 상대적일 수 있는 경우는 이와 같이 해석자가 오류를 범했을 때 뿐이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로 인식 했을 때에만 진리다. 다르게 인식을 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저 자기 생각일 뿐이다. 따라서 상대적 진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그가 가진 생각은 단지 그만의 생각(혹은 견해)일 뿐 진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진리와 무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진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이 한 발 양보해서, 겨우 진리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면, 진리는 자신을 억매는 사슬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진리는 나를 제한한다. 이것도 못하게 하고, 저것도 못하게 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는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제한하는 그것(바로 이것이 참 진리이다.)은 거짓가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을 제한하는 참)진리를 부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진리를 자신과 상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사람들에게 만약 진리가 존재하다면, 오직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것만이 진리다. (그들에게 있어)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은 내 영혼의 기쁨을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저 오늘 하루를 즐기며 살기를 원한다. 따라서 나를 만족시켜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이 진리다.

 사람들에게 내일은 오늘의 반복일 뿐이다.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다. 오늘을 사는 것은 내일을 위함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것은 보상을 얻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오늘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찾는다. 만약 내 수고에 보상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곧 진리이다. 단 하나의 절대 진리는 나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참)진리는 나와 상관이 없다.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진리에 무관심한 오늘의 세대에게 단 하나의 진리를 부르짖는 우리(그리스도인들)는 바보들이다. 절대 진리만을 고집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사람들이다. 하나만 옳다며 다른 것을 거부하는 우리는 배타적인 광신도들이다. 이제 우리는 믿지 않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까지도 받는다. 우리는 현재 (어떠한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에 놓여 있다. 우리는 (동일한 사람들의) 극렬한 거부를 마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리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개독이라는 오명을 받더라도 우리는 진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고, 몰아 세워도 우리는 진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 좀더 유연해질 수는 없는가? 우리는 어떠한 평가를 받더라도 진리에 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절대 타협할 수 없다.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그 답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구원 하셨다. 진리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대적한 극악무도한 죄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 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렸다. 그분을 거부했다. 우리는 자의로 하나님을 모욕했다.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우리 갈 길로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모든걸 용서하셨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를 대신 지도록 하셨다. 그 아들을 통해 다시 품기로 한 자들을 구원 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손길을 뿌리친 우리를 다시 거두셨다. 우리(참 그리스도인)가 진리를 고수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도르트 신조 강해'

 본서는 이상의 사항을 간명하게, 그러나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인이 함축하고, 극히 일부분만 언급한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본서 '도르트 신조 강해'에서는 명확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런 이 책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첫째는 개혁주의자요, 둘째는 비개혁주의자, 그리고 셋째는 비그리스도인이다.

 첫째 개혁주의자. 본서는 저자인 코르넬리스 프롱크 목사가 자신이 시무하는 한 자유개혁교회에서 했던 설교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본서는 개혁주의자, 그중에서도 설교가 행해졌던 그 교회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용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다. 책으로 출간된 본서의 대상자는 그것으로 국한 되지 않는다.

 책으로 출간 되었기에 그 대상자의 범위가 확대된, 이 책의 또 다른 대상자는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다른 관점을 가진 비개혁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본서가 전하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인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어봤어도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혹은 5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나 그 이상, 아니면 전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본서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불신자들은 본서의 내용을 들어 볼 일이 거의 없을 것이고, 설령 들어볼 기회가 있어도 무관심 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의 불신자들에게 본서의 내용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말장난으로 비춰질 것이다. 어쨌든 책으로 출간된 이상, 본서의 대상자는 불신자에게까지 확대 되었다. 그렇다면 이 한 권의 책의 대상자가 어떻게 세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개혁주의자(일반적으로 '개혁주의자'와 '칼빈주의자'는 같은 의미로 혼용되어 사용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개혁주의자'는 '칼빈주의자'를 포괄하는 좀더 넓은 의미로 구분 된다. 여기서는 둘을 같은 의미로 축소하여 '개혁주의자'로 통칭하여 사용 할 것이다.)들에게 있어 '칼빈주의 5대 강령'(이하 5대 강령)은 고백할 수밖에 없고, 유지/전수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귀한 유산이다. 그것은 성경 66권의 요약본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내용에 있어 무척 중요한 사항들을 간명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르트 신조'라 불리기도 하는 '5대 강령'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근본을 명확히 전하고 있다. 성경의 전부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의 핵심을 논하고 있다. 본서는 그러한 '5대 강령'을 충실히 강해하고 있다. '5대 강령'의 내용을 제함 없이, 왜곡 없이 성실히 , 그러면서도 풍성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인 개혁주의자들은 본서를 필독해야 한다.

 '5대 강령'의 탄생 배경은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잘 모르는 이들의 수고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언급하는게 좋을 것 같다. 17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복음의 가르침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한때 개혁파 신학자였지만 그 길에서 벗어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를 혼란케 하는 '알미니안 신학'을 탄생시킨 '야코뷔스 아르미니스[Jacobus Arminius, 1560.10.10 ~ 1609.10.19]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가르침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개혁주의의 가르침을 변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개혁파 신학자들이 모였고,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그때와 같이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개혁신학을 거부한다. 그들은 특히 '5대 강령'에 대해서 크게 몸서리를 친다.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거나 단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한 것이라고 항론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5대 강령'은 어떠한 변론에도 거부의 대상이 된다. 본서가 이처럼 개혁신학과 '5대 강령'을 오해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설득하여 돌이키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본서를 통해 최소한 그들에게 '5대 강령'이 무엇이고, 무엇을 말하는지는 충분히 전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5대 강령'에 대해 아예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어봤어도 관심이 없던 이들에게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서는, 어쩌면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과 같이 단순하고, 간단하며 한 눈에 들어오는 것만을 추구하는 세대에게 본서는 결코 적합하지 않은 책일지도 모르겠다. 가격도 두께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용 또한.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구도자에게 본서가 전해지고 한 장이라도 읽혀지게 된다면, 본서는 그들에게 진리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과 같이 복음을 왜곡하여 전하는 때에 복음을 잘 보존하고 있는 본서를 믿지 않는 지인들의 손에 쥐어 준다면 설령 당장은 한 구석에 둘지라도 언젠가 마음이 동하여 펼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손길이 성경으로, 그의 영육이 구원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해 봄직하다!

 자, 이제 본서는 누구에게라도 추천해 줄 만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본서의 내용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이상의 설명은 '본서는 어떠한 책인가?'라는 설명을 간접적으로 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서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설명 할 차례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펼쳐놓기보다는 간단히 전하는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추상적일테지만) 궁금증을 자아내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본서는 앞서 언급한 '칼빈주의 5대 강령'을 강해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그 내용이 '5대 강령'에만 전적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다. 본서는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죄와 구원을 전한다. 반면 복음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심판을 선고한다. 다시 말해서 본서는 독자들에게 복음의 약속과 경고를 한치의 거짓과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섭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이후, 오순절 은사와 신유 운동의 주도 하에 잘못된 가르침이 편만한 현재의 교회에, 성도들의 혼란한 신앙을 바르게 정돈해 준다. 본서를 제대로 읽은 독자라면, 읽는 중에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무릎을 꿇고 그분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이 책이 전해진 것은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 할 그분의 특혜이다.

 사람들이 진리에 무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들은 진리를 거부할까? 그들은 그 자신들의 죄 가운데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죄 가운데 갇혀 있기 때문에 진리와 멀어져 있다. 그들의 죄가 진리로 향하는 눈과 귀를 막고, 발걸음을 자꾸만 돌이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스스로 진리로 향할 수 없다. 그들은 절대로 진리를 그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계속적으로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계속 진리를 거부하며 조롱 할 것이다.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른채.
 우리는 그들을 어떠한 말로도 설득할 수 없다. 우리의 어떠한 말에도 그들은 콧방귀를 뀔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 진리를 전해야 할 의무가 잊는 빋진 자들인 우리. 그럼에도 그들을 부지런히 이해시켜야 할까? 아니면 주저 앉아 이 세대의 어리석음을 넋놓고 탄식해야 할까? 둘 다 아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는 조롱과 모욕을 당하더라도 진리를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 어떠한 비난에도 진리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가장 먼저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는데 힘을 써야지 그들과 같이 그들을 손가락질을 하는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에게 진리가 가리워진 것은 그들의 죄가 일차적 원인이지만, 우리의 모습과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탓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삶으로 영광과 찬송을 온전히 올려 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회가 되는대로 진리를 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정하신 그 때에 별안간 역사하셔서 또 한 사람의 택한 죄인을 무지와 죄에서 은혜와 구원 가운데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족하다며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는 구원 받지 못한 죄인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