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순결
엘리자베스 엘리엇 지음, 양은순 옮김 / 예향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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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변하여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 그 정의와 그것을 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의 사랑은 주로 마음을 나누는 것이었다. 상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상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었다. 상대의 생각을 듣고 공감하여 상대의 내면을 알아가며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기꺼워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상대를 알아감으로 서로에 대한 연정(戀情)을 차근히 키워가는 것이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사랑은 이와 거리가 멀어졌다.

 오늘의 사랑은 주로 육정(肉情)적이다. 육욕적이다. 서로의 육체에 대한 탐닉을 통해 나의 쾌락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다. 상대를 만지고, 탐하여 나의 색정(色情)을 채우는 것이 일단(一旦)의 목표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어쩌면 그 목표를 채우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단지 하나의 도구로 여겨진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로 남성의 방식이다. 어쨌든 이제 사랑은 감정보다는 육체를 우선으로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마저 그러한 잘못된 사랑의 방식을 쫓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자기 절제와 순결은 고리타분한 생각이다. 사랑을 하면 으레 상대의 몸을 (어떠한 방식이 되었든) 취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믿지 않는 이들에 비하면 아직도 자기를 잘 지키는 미혼의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와 방식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고 어느 것이 옳은 사랑의 방식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러한 혼돈은 연애와 결혼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방식을 취하게 만들고 있다.


 '열정과 순결'


 본서는 성과 사랑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참으로 무질서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옛 방식은 결코 쓸모 없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책이다. 창끝(End of the Spear)이라는 영화 등을 통해 알려진 순교한 짐 앨리엇 선교사,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남편이었던 짐 앨리엇과 어떻게 사랑하고 연애를 했는지 보여줌으로써 이 시대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순결하고 열정적인 사랑이 충분히 가능함을 전한다.

 본문은 총 43장으로, 크게 보면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독신에 대한 견해, 사랑이 찾아오기까지의 기다림, 연애의 방식, 그리고 결혼까지 열정과 순결을 지키는 방법 등을 알려준다. 내용은 저자인 엘리자베스의 관점에서 그녀가 남편이었던 짐을 만나기 전, 그리고 그를 만나고 연애하까지의 경험과 생각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그녀의 일기, 그리고 짐과 주고 받은 편지들, 그녀가 다른 이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상담해 준 사례 등을 첨가하여 솔직함을 더하고, 다양한 경우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본서를 통해 엘리자베스는 옛 방식의 사랑과 연애는 결코 낡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며 특히 그 방식을 통해 하나님께 충분히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성을 사랑하고, 연애를 하는데 있어 순결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비록 인내는 고통스럽고, 기나긴 기다림은 때론 실망과 아픔을 가져다 주지만 그것의 열매는 무척이나 달콤함을 알려준다. 우리는 사랑과 연애와 결혼, 그 모든 과정에 있어 우리의 욕망에 지배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과정 모두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그분을 의지하는 가운데 정결함을 유지함으로 그에 대해 주어지는 풍성한 열매를 맛 볼 것을 권한다.

 본서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좋지만,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띈다. 내용과 상관 없이 엘리자베스의 3번의 결혼 사실은 성경을 주장하는 본서의 내용에 어폐가 될 여지가 있다. 물론 독자가 그것에 대해 신경을 쓰고 평가 할 이유와 책임은 없다. 하지만 결혼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상기할 때, 그러한 사실은 연애와 결혼에 대해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는 본서의 메시지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육체와 영을 구분하여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보는 저자의 견해는 오해와 논쟁의 여지가 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또 다른 아쉬움은, 내용이 다소 산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서는 저자 자신이 사랑을 구하는 단계에서부터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오고, 사랑을 하는 등의 일련의 순서대로 기록 되어 있다. 그 순서를 구성하고 채우고 있는 내용들 중 불필요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꽤 많다. 내용을 좀 더 정련(精鍊)하여 사랑과 연애 및 결혼에 실직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 내용들 - 예를들면 다음으로 지적 할 아쉬움을 보완 할 만한 - 을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끝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기독교 율법,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있어 지키고 따라야 할 방식과 한계가 어디까지가 성경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동의해야 할지 의문이 든다. 물론 저자가 순결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분명히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 순결이라는 기준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그것을 과연 누가 정할 수 있을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기준, 이를테면 연애의 진도라고 하는 상대를 만지고, 쓰다듬고,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며 잠자리를 함께하는 오늘의 세상적 기준 및 과정들 중 과연 어디까지가 성경에 부합하는 것일까? 안는 것까지만? 아니면 손을 잡는데까지만? 아니면... 성경에서는 그러한 것까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음행을 피하라고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음행일까?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여기까지가 성경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수긍할 있는 순결에 대한 정의와 이해 및 한계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본서에서는 그렇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위에서 길게 지적한 아쉬움은 이 책을 읽는 독자가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은 다른 책을 참고하면 된다. 독자는 본서에서 취할 수 있는 부분을 취하면 될 것이다. 사랑과 연애에 있어 하나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노력. 특히 하나님이 남녀에게 육적 교합을 허락하신 합당한 시점인 결혼까지 순결을 지키려는 굳은 의지.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충분히 만족 할 만한 사랑을 할 수 있고, 열정적인 사랑이 가능함을 배워서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노력하면 좋을 것이다. 본서는 비록 여성의 관점에서 씌어졌지만, 여성만 읽어야 할 책은 아니다. 남성들은 여성을 이해하는데 본서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이성을 사랑하고 대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모든 말을 정리하면, 사랑을 구하고 원하는 모든 미혼의 남녀에게 본서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기다리고 순결을 지키며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세상의 방식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모든 것을 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나 육체에 대해서. 따라서 사랑하면 당연히 함께 잠자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기 전이라도 사랑을 하면 잠자리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남성의 경우 여성과 잠자리를 했느냐 안 했느냐, 몇 명의 여성광 잠자리를 했느냐가 남성성, 그 능력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며 여성과 잠자리를 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래서 남성의 연애의 목표는 여자 친구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의 오늘의 세상적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혼 전 음행을 피할 것을 말씀한다.

 연애는 결혼을 위한 준비 기간이다. 단지 육체적 괘락을 즐기기 위한 합법적 도구가 아니다. 연애는 결혼 전까지 서로를 알아가고, 아끼며 지켜주는 기간이다. 그 열매가 되는 결혼을 위해, 보다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 - 물론 결혼 이후에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지만 - 자신을 준비시키는 기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연애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연애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기쁘시게 하는 연애인지 사랑하는 남녀는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순결은 왜 지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직시하고, 어떻게 하는게 순결을 지키는 것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보다 열정적인 사랑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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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과 스콜라주의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 시리즈 2
빌렘 판 아셀트 외 3명 지음, 한병수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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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의 '개혁파 정통 교의학(Reformierte Dogmatik,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을  읽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헤페는 교의학을 19세기 이전의 신학과 연결을 시켰다. 그는 그 책을 통해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신학자들과의 연합을 이루었다. 헤페는 각 항마다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과 신학을 인용 및 정리, 목록화하였다. 그는 방대하고도 역사적인 그 작업을 통해,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귀한 신학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의 노력을 통해 본인은 처음 들어본 신학자들에게 매료 되었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자들과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수 백 년에 걸쳐 있었고, 그러한 까닭에 그 신학은 매우 방대하였다.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고, 처음부터 태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관심은 이내 사그라 들었고, 결국 본인의 관심은 주요 종교개혁자들로 옮겨지게 되었다.

 


 '개혁신학과 스콜라주의'


 사그라 들었던 본인의 관심에 다시 불을 붙인 책이 출간 되었다.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시리즈' 두 번째 책인 '개혁신학과 스콜라주의'이다.

 본서는 벨기에 복음주의 신학교의 빌렘 판 아셀트외 3명이 공저한 책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는 낯선 저자들로 다소 생소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막 그 내용들은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본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스콜라주의 안에서의 신학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서는 '16 ~ 18세기 개혁주의 학자들이 사용한 스콜라적 신학 방법론에 대한 개요'를 담고 있다. 내용을 들여다 보면, 개혁파 스콜라주의란 무엇인지, 그와 관련된 학계의 동향,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차이점, 개혁파 스콜라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연관성, 중세 스콜라주의 하에서의 학교 교육 방법론, 정통주의 시대의 역사적 흐름 등을 다루고 있다.


 본서를 읽기 위해서는 주의 해야 할 부분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특히 용어 문제는 반드시 확실하게 해결해야 한다. 본서는 그 특성상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내용 이해에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서의 서론을 인용하여 용어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본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스콜라주의', '정통주의', '개혁파' 등의 용어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스콜라주의'는 특정한 '내용'과 결부됨이 없이 '방법론'을 가리킨다. '정통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에서 16 ~ 18세기까지 이어지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며 '방법론'이 아니라 특정한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 개혁주의 전체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칼빈파'와 같이 한정된 용어가 아니라 '개혁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이상 20 ~ 24p). 최종적으로 '개혁파 스콜라주의'는,


 (1) 학교의 학문적인 신학을 의미

 (2) 정통주의 시대에 실행된 신학을 가리킴

 (3) 내용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신앙고백들과 연결됨(25p)


 을 유념하고 있어야 한다.


 본서의 장점은 스콜라적 방법론의 배경과 구조 및 역사적 흐름을 잘 개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주의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정리, 그들의 궤적과 계보는 참으로 돋보인다. 부록 1을 통해 제공하는 개혁파 스콜라주의 문헌 연구를 위한 안내 지침은 무척 유용해 보인다. 총평으로 본서는 개혁파 스콜라주의 연구 입문자에게 매우 유용성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어디서부터, 누구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그 고민을 덜어 줄 것이다. 연구의 시작점을 알려 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본서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연구를 잘 이끌어 줄 뛰어난 스승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승을 둘 수 없는 자의 목마름을 어느 정도는 풀어 줄 것이다.

 


 개혁파 신학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종교개혁부터 시작하여 19세기까지로 이어지는 구간에서 활동 했던 모든 개혁파 신학자들의 삶과 신학 및 그들이 사용 했던 신학적 방법론에 대해 전부 공부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루어야 할 인물과 자료가 너무나 방대하고, 따라서 그 과정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연구해도 마침표를 찍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개혁파 신학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 되어야 한다."는 개학파의 모토와 같이 '개혁된 신학은 계속 개혁'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욕을 부릴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개혁파 신학은 성경을 좀 더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결코 바람직 하지 않다. 먼저는 성경 연구에 집중해야 하고,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개혁파 신학을 도구로 사용해야 함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에 주의해야 함을 강조하며 개혁파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좀 더 쉬운 방법을 소개하면. 개혁파 신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탄생한 신앙고백서들을 연구하고, 주요 신학자들의 삶과 신학, 그리고 쟁점이 되는 신학 주제들을 연구해 나간다면 개략적인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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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을 먹이라 - 성경적 설교의 본질, 기초, 능력, 그 열매 Coram Deo 코람데오 시리즈 3
제임스 보이스 외 지음, 장호준 옮김, 존 맥아더 외 / 복있는사람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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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에 만연한 현상이 있다. 그 현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두드러지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성경적 설교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 교회는 성경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설교하는데 성경적 설교를 하지 않는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맞는 말이다. 모든 교회가 설교시에 성경을 사용한다. 성경 말씀을 봉톡하며 그 내용을 설교한다. 하지만 그 설교를 잘 들어보면 성경에 담긴 내용이 아니라 온통 다른 내용들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에 예화가 가득하고, 시사, 상식, 덕담 등 온통 귀에 듣기만 좋은 소리가 가득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결코 성경적 설교라고 할 수 없다. 단호히 말하면, 그것은 예배의 한 요소로서 바른 교회임을 가늠할 수 있는 바른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잘못된 설교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모든 교회가 잘못된 설교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그분에 대해 잘 가르치는 교회가 아직 많이 있다. 하지만 아마도 더 많은 수의 교회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


 본서는 잘못된 설교가 만연한 한국 교회에 참된 가르침을 제공한다. 설교자들에게 성경적 설교의 중요성과 기초를 가르친다. 예화집에서 잔뜩 베끼고, 인터넷 유머나 생활체험 등으로 얼룩진 오늘의 잘못된 설교에 비수를 꼽고, 바른 설교의 회복을 종용한다. 바른 설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른 설교란, 성경적 설교 즉 강해 설교이다. 강해 설교란 어떠한 것인지,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말한다. 단지 강해 설교에 대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설교가 왜 중요한지, 설교는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설교자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지적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 먼저 체험해야 하고, 설교는 회중의 지성과 마음에 전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본서는 목회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설교, 바른 설교란 어떠한 것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이 책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설교의 자세를 교정 받고, 설교자의 뜨거운 소명을 회복하는데 본서는 큰 자극을 줄 것이므로 목회자들의 필독서라고 하고 싶다.

 그렇다고 목회자만 읽어야 할 책은 아니다. 성도들도 읽으면 도움이 되는 점이 있다. 먼저 성도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성도가 본서를 잘못 읽으면 목회자를 판단하고, 그 설교를 평가하며 정죄하는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만야 그렇다면 그는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고, 이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성도가 본서를 읽을 때는 설교와 설교자가 왜 중요한지, 설교를 들을 때는 단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부분을 얘기하는 장(chapter)에 초점을 맞추며 읽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설교 및 설교자를 대하는 바른 태도를 배우게 될 것이다.


 바른 설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역사(役事)를 가르치는 설교. 반대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의 말씀을 깨닫는 설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북돋으며 그분을 위한 사명과 열정이 타오르게 만드는 설교가 바른 설교일 것이다! 그러한 설교는 오직 성경을 말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를 먹이시며 자라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설교는 하나님의 양들의 영을 풍성히 살찌우며 자라게 한다. 성경에 담긴 말씀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그것을 가감없이 전하는 설교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한다. 성경 말씀을 오롯이 전하는 설교는 상한 영을 치유하고, 완악한 마음을 고꾸라져 하나님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든다. 설교자는 그런 설교를 해야 하고, 성도는 그런 설교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하나님의 양들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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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5대 제국 - 통通박사 조병호의
조병호 지음 / 통독원(땅에쓰신글씨)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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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인류의 역사(歷史)와 면밀한 관계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歷史)를 통해서 일하신다. - 물론 역사(歷史)라는 말 자체는 지나간 과거의 자취를 뜻하지만, 어쩄든 -  하나님은 인류와 그 역사(歷史)를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歷史)에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녹아 있다. 따라서 인류사를 잘 들여다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성경과 5대 제국'


 본서는 성경과 관련된 세계 역사와 성경 속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접촉점, 바꿔 말해서 성경과 연관이 있는 제국들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와 이스라엘 민족 - 본 평에서는 편의상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모두를 통틀어 국가를 칭할 때는 '이스라엘', 민족을 칭할 때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기술한다. - 의 긴장 관계를 잘 조망한다.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신앙을 보여주고, 그들의 삶과 신앙에 담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다섯 제국의 역사를 담기에는 책의 분량이 적어 보인다. 때문에 저자는 다섯 제국의 역사 중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이 있는 부분만 살펴본다. 덕분에 본서에는 제국의 역사에서 필요한 부분이 잘 요약 되어 있다. 그와 맥을 같이 하는 이스라엘 역사가 잘 정리 되어 있다. 본서의 백미는 그러한 인류 역사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신앙과 하나님의 경영하심 및 그분을 섬기는 방법을 잘 가르친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 경영하심을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돕고, 그분으 올바로 섬기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참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쉬움도 느껴진다. 내용 구성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교훈과 정보를 하나라도 더 담으려다보니, 가끔 내용 전개에서 이탈하는 일이 발생한다. 물론 도움이 되는 내용이지만 그것이 읽는 흐름을 방해하곤 한다. 때문에 차라리 모양새는 좋지 않더라도 각주로 넣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이 방법이 낫다고 생각되는데) 한쪽 페이지를 따로 꾸며서 '흥미거리' 등의 타이들을 달아 제공하였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더하여 학자로서 균형을 잃고 링컨에 대해 편향적으로 평한 데에 아쉬움을 느낀다.

 아무튼 본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이스라엘 역사(歷史)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신학생은 물론 성도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앞서 인류사를 잘 들여다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개인사에도 적용 된다. 오늘과 어제가 다르다. 어제와 그제가 다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어제와 그제를 잘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다. 역사, 과거 인식이 필요한 이유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니다. 역사에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이 담겨 있다. 역사를 통해 인류의 잘못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앞으로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울 수 있다. 지난 날의 실수를 깨닫고 앞으로를 보완할 수 있다. 무엇이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살펴봄으로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더욱이 역사를 잘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의도하심을 알 수 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 배울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 과거를 잊혀져야 할 기억으로 여겨 기억 깊은 구석에 뭍어둘 것이 아니라, 언제고 꺼내어 볼 수 있도록 항상 곁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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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시리즈 3
라일 비어마 외 지음, 신지철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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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잘못된 교리에 맞서 바른 신학과 신앙을 세우고 지키기 위한 종교개혁자들의 노력과 투쟁은 신앙고백이라는 유산을 만들어 냈다. 종교개혁자들이 작성한 신앙고백서들은 교회에 제공된 귀한 유산들이다. 그 유산들은 비록 신학적 내용들을 담고 있으나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성도들을 가르치고, 교훈하여 그들의 신앙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졌다. 그 유산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져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유산을 활용하는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유산들의 존재를 아예 모르거나, 혹 알더라도 그것들은 낡고 우리에게는 맞지 않은 것으로 여겨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그 값지고 풍부한 유산들을 외면한채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교육하고 있다. 잘못된 교육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는 신앙적 무지와 혼란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의 이유와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16세기에 작성된 신앙고백서들 중 으뜸을 차지하는 신앙고백서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성경공부와 신앙교육을 위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본서는 그러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한 안내서이다.

 본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한다. 그것의 기원을 상세히 다룬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인, 주요 저자를 밝힌다. 또한 그 교리문답의 작성 목적과 내용의 특징을 살핀다. 주요 저자 중 한 명인 우르시누스의 소교리문답 및 대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관계를 논한다. 본서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작성은 주로 두 명이 주측이 된 것으로 여겨졌다.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르시누스가 교리적인 부분을 작성하고, 올레비아누스는 신앙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다듬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본서는 그러한 분석을 비판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여러 학자들의 공동 작업의 결과인 것은 맞지만 기존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올레비아누스의 역할은 크지 않다고 본다. 대신 우르시누스가 주요 작성자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일각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칼빈주의, 멜란히톤파, 츠빙글리파, 불링거파 등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는 신앙고백서라 주장한다. 하지만 분서에서는 그러한 꼬리표에 주의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과 압박의 상황에서 탄생하였기에 교회일치를 위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음을 주지시킨다. 다시 말해서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신학적 입장으로 나뉘어져 논쟁을 벌이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 신앙의 일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작성케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신학적 입장의 근거를 제공한 신학사상 또는 자료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굳이 신학적 이름표를 붙여야 한다면 아우굿부르크 신앙교백(수정본)에 멜란히톤파와 개혁파의 주해를 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덧붙여서, 그럼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개신교의 다양한 입자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뜻을 요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우르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이전에 대소교리문답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본서에서 밝히는 바에 따르면 우르시누스는 소교리문답을 먼저 작성하고 대교리문답을 후에 작성한 것으로 본다. 전자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성인과 청소년을 위해서, 대교리문답은 대학생을 위한 중급 신학 교재를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더하여 소교리문답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초안 작성에 활용된 반면, 대교리문답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작성되던 과정의 후기에 참고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본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한 심도 있는 정보와 다양한 자료를 제공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목적, 저자, 역사적 기원, 그리고 그 신학적 기초와 입장 등 그것의 전반에 대한 귀한 지식과 목록을 제공하여 그것을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입문서 역할을 한다. 본서를 통해 독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보다 정확히 이해함으로 그에 대한 연구에 깊이를 더하고, 교리문답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후반부에서 제공하는 우르시누스의 대소교리문답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사이의 일치와 차이를 분석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해 알기 원하고 그것을 연구하며 개인과 교회에 더욱 효과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이라면 본서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신앙고백서를 통한 교리 교육은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체질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신앙고백서는 신앙을 바르게 하며 그것을 보다 완숙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지만, 훈련되지 않은 이는 혼자서 그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성경으로부터 체계적인 지식과 교훈을 이끌어낼 수 없다. 이때 매우 유용한 것이 신앙고백서이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신앙의 선배들이 그들에게 주신 바른 지식과 분별력으로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교육서이다. 신앙고백서만으로 성경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신앙고백서를 통해 성경의 주요 내용, 필수적인 가르침들을 손쉽게 습득할 수 있다. 성도를 바르게 하는데 있어 최상의 교육 자료로 신앙고백서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활용 할 필요가 있다.

 신앙 교육을 위해 다른 방법을 사용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정리하는 수고를 또다시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선배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활용하면 된다. 그분들이 전해준 유산은 성도들을 가장 바르고 안전하게 교육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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