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어 이름을 쥬디 애보트(키다리 아저씨 여주인공 이름) 처럼 이름과 성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배워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출생증명서를 보면 그들의 이름은 덩어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로 미들 네임이 있다는 . 대부분 미들 네임을 밝히지 않아서 모르지만 들여다보면 그렇다는 이야기. 그래서 미국인들이 간혹 미들 네임이 없는 교포들의 이름을 들으면 우리가 외자 이름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갖는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글의 저자는 미들 네임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교포들은 엄마의 성을 미들 네임으로 넣기도 한다.) 아마도 글의 저자도 어머니의 ( 전체에서 저자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박씨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렇게 미들 네임까지 밝힌 미국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책의 제목은 소위 소수적 감성이다. (그래서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는 부제가 부각되어 보이기도 한다. ) 코비드 19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빈번해지고 있다는 뉴스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직전 책이 출간되어, 작가는 어떻게 그렇게 절묘한 시기에 책을 펴냈는지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나는 이런 정도의 소식만 보고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에 1/5 정도 읽었을 즈음, 어렸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악수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악수하던 여자아이들 하나가 할머니 뒤로 몰래 할머니를 밀쳐 넘어 뜨렸다는 일화가 나와 여기에서 읽기를 그만두었었다. 에피소드가 인종차별적 사건의 예로 등장한다는 것이 너무나 소수적 감성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읽다 말고 던져두기에는 마음을 울리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이국 생활을 경험하고 실제로 아직도 이국에 살고 있는 번역가에게 출판사 관계자는 역자가 오래 이국 생활을 했으므로 저자에게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면서 번역을 부탁해 왔다고 역자는 밝혔다. 그러면서도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누차 언급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나는 저자가 겪은 일들을 일처럼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분명히 일정 부분 공감할 있다.( 273-274)’. 쉽게 말해 저자는 교포고 역자는 그렇지는 않아서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역자가 완전한 이해는 어렵다고 강조하지만 이국 생활을 경험해 사람들은 저자의 말도, 역자의 말도 이해할 있다. 어차피 무엇이든 완전한 이해는 없다.

 

유학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유학 생활은 역자도 언급했듯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점에서 그곳이 생활터전이라 달리 곳이 없는 교포의 생활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고생담도 미담처럼 들리고 무용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년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이 불의에 눈감고 마음을 다잡고 앞만 보고 달리기를 종용하므로 미담 또는 무용담으로 가득찬(또는 승화된) 유학 관련 에피소드는 그런 면에서 국내 생활자나 교포들에게 분노를 일으킨다. 국내 생활자는 막연히 유학 생활을 부러워하게 되고(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어지고) 교포들은 뭣도 모르는 풋내기들이 하는 식으로 무시하게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 유학생과 거주자들 또는 이민 2,3세대들은 사이가 좋지만은 않다. 이는 비단 한국인이 단합을 해서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미국에 살고 있다는 점과 한국 출신이라는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자가 재삼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일 게다. 나는 완전히 저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을 접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면서도 끝까지 읽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유는 이제까지 인종 갈등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해서, 모르는 하도록 주입되어서 등등의 다양한 이유로 미국에 사는 동양인들은 아니 한국인들은 인종 갈등 또는 차별을 당하지 않아본 것처럼 군다. 보통은 영어를 하면, 좋은 직업을 가지면 그런 대우를 받지 않을 것으로 여긴. 그러나 책에서는 권력을 쥐면 쥘수록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는 여러 케이스들이 나온다.

 

대중의 머릿속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은 모호한 연옥 상태에 놓인다.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며, 흑인에게는 불신 당하고 백인에게는 무시 당하거나 아니면 흑인을 억압하는 일에 이용 당한다. 우리는 서비스 분야의 일개미이며 기업계의 기관원이다. 우리는 리더가 되기에 적절한 얼굴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대량으로 숫자를 처리하며 기업의 바퀴가 굴러가도록 기름이나 치는 중간 관리자가 된다. (26)’ 저자는 이렇게 일갈한다. 학위를 따기만 하면 바로 돌아갈 유학생의 처지 말고 취업을 해서 미국 땅에 뿌리박고자 직업 세계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말을 이해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는 백인에게 인종 문제를 참을성 있게 가르치기란 정말 고되고 피곤하다. 내가 가진 설득의 능력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야 한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아니, 실상은 그보다도 훨씬 까다롭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들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37)’ 무지하든 무지하지 않든 모든 것을 시시콜콜 이해시키기란 너무도 난해하면서도 귀찮고 성가신 일이고, 동료들은 모두 좋더라도 다수의 대중들은 아무 생각이 없기에언제 어디서 맞닥뜨릴지 모르는 다수의 무지인들을 설득할 생각을 하면 골치가 아파지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포기하게 된다.

 

게다가 유색인종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나 개인적으로나 남보다 올바르게 행동해야 했으며, 항상 품위 있게 행동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백인들이 작가의 인종화된 체험에 편안하게 공감할 있도록 해야 했다…” "인종에 관해 쓰고 싶으면 예절 바르게 써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니까요.”(73-74) 라 저자의 언급처럼 우리는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대목에서는 굳이 유색인종 작가 아니더라도 작가 그냥 보통 사람으로 바꾸어도 얼마든지 성립되는 말이었다. 엘에이에서 보험판매를 하면서 다양한 인종들을 섭렵한 저자의 아버지는 불법 유턴을 하는 저자에게 운전 제대로 해라, 그러면 동양인이 운전 이상하게 한다고 욕먹는다 주의를 준다. 이럴 딸인 저자는 아버지가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한 과잉반응을 보인다고 치부하지만 거주 경험자들은 이해한다. 우리가 경찰을 보통 x새라고 욕하고 정말 필요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라고 몰아세우지만 무고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 혹은 우리를 해칠 사람이라고까지는 인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경찰을 만나면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관련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어서일수도 있으나 미국은 어떤 경찰, 어떤 공무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처우나 처리방법이 천양지차이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야 한다. 완전 복불복 느낌이다. 동양인을 보는 그들의 눈빛은 준범죄인을 쳐다보는 눈빛과 같은 경우가 많다.)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을 만나면 오히려 두려워지는 나라에서 우리는 과연 성공한 동양인(혹은 외국인)으로 행복하게 있을까.  과하게 말하자면 항상 올바르고 품위있게 행동하지 않으면(심지어 그렇게 행동해도) 언제 경찰한테 걸릴 지도(걸려서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헬조선이어도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인가.

 

이밖에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문학에 대한 작가의 평가에도 공감이 됐다. 특히나 줌파 라히리에 대한 시각이 나와 같아서 놀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명 한국작가들이 그녀를 많이 언급해서인지 한때  유행했었는데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부드럽게 미국 사회에 동화되는 인도인들이 쉽게 공감되지 않았다. 저러면 다들 이민 가겠네 싶었다. 하지만 이유는 이랬다. ‘지난 20 동안,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도, 줌파 라히리의 작품들은 아시아계 이민자는 순응적인 노력가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인종적 소설의 전형이었다. ..라히리는 문화적 차이를 찾는 백인 독자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적당할 수준으로 편안한 인종적 소품을 이용해 무덤덤하고 억제된 어조로 글을 썼으며, 작품 인물들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고 그저 행동한다. (75)’ 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우리의 정체성을 자동으로 규정하는 낡은 인종 서사, 우리의 삶을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다양한 현실을 삭제해버리는 낡은 인종 서사를 갈아 치우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공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그만두자. (75)’ 일갈한다이런 면에서 영화 미나리 자유로울 없을 한데 저자의 소감이 듣고 싶었으나 책에서는 아쉽게도 언급되지 않았다


저자는 인종주의의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 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없기 때문이다….’ 대목은 정말 닿는다. 내가 겪어오고 보아왔던 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 앞에서 언어장벽으로 불이익을 겪거나 모욕을 당하고, 아이는 그걸 지켜보고 있거나,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를 대변하여 최대한 권위 있게 발언하는 법을 배웠다. 백인 여자의 눈에 서린 비웃음을 물리치고 싶었고, 정신이 번쩍 들게 유창한 영어로 사람이 지녔던 생각을 부끄럽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제 깨닫지만, 내가 글쓰기에 끌린 것은 우리 가족을 부당하게 재단했던 사람들을 재단하고, 내가 상황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음을 입증하려는 목적도 얼마간 있었다. (138)’ 는 저자의 언급처럼 적극적으로 부모를 돕는다.

 

이어서 나라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굴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아시아인은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에 주눅이 들어 있다. 근면성을 발휘하면 존엄성으로 보상 받으리라 믿고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근면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뿐이다. 우리가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우리의 수치심은 억압적인 아시아 문화와 우리가 떠나 나라가 초래한 것이 되고 미국은 우리에게 오로지 기회를 주었을 뿐이라는 신화를 영구화하게 된다. 아시아인이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은 너무나 은근히 퍼져 있어서, 지금 글을 쓰면서도 나도 남들에 비하면 나쁜 처지가 아니었다는 의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인종적 트라우마는 누가 앞서고 뒤지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문제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이례적이 아니라 실은 오히려 전형적이었다는 있다. (112)’ 언급을 읽고, 이런 고발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뭔가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은 자신이 루저임을 인정하는 같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저자는 과감히 자신의 소수적 생각 펼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예술적, 문학적 소양 때문인지 매우 전문적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전개된다.  책 유나이티드, 스탠드업, 백인 순수의 종말, 서투른 영어, 어떤 배움, 예술가의 초상, 빚진 라는 7개의 소제목으로 각각의 글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마지막 챕터가 조금 아쉬웠다. ‘어떤 배움에서는 자신의 대학시절 친구들 이야기가 나오지만 응집성이 떨어져 보였고,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테레사 학경 라는 뉴욕시에서 강간살해 되었으나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보도되지 못했던) 한인교포 예술가가 나오고, 마지막 챕터인 빚진 에서는 재미 일본인으로 인종 차별에 항거하는 사회 운동을 했던 유리 고치야마 나온다. 이들은 모두 재미아시안여성으로, 미국에서 어떤 인종 차별적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선정된 인물들 보이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책은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므로 번역서를 읽는 우리가 조금 감안해서 생각해야 부분이 있는 같다. (미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작가의 의도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인물과 케이스들을 발굴 소개하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시술이 되어버린 쌍꺼풀 수술이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서 복무하던 미국 외과 의사가 아시아인의 눈을 서구적으로 만들기 위해 창시한 것으로, 한국 성노동자들에게 시술해 미군 병사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259)' 등의 언급처럼 부수적으로 알게 된, 놀라웠던 사실들이 많았고, 마지막 부분에 역자가 글에서 소개된 에피소드-저자가 지하철에서 자신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맞대응했던 사건- 옮기면서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 그것이 주저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야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발언을 하는데 이것도 정말 이해되었다. 유럽 여행에서 들은 나라로 돌아가라는 발언은 그냥 무시하고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곳이 삶의 터전이라면, 이런 상황에(또는 이런 상황이 언제든 펼쳐질 있는 상황에) 상시 노출되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므로 스트레스는 단순히 스트레스라고 표현되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인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을 알겠다.

 

책이 퓰리처상 파이널까지 갔다니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책을 오래간만에 읽었다. 출간 후 일년이 지난 지금 현지의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세상은 진보하는가, 과연 진보하는가, 앞으로 나아가는가? 진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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