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읍시다. 지금 우리의 지성 네트워크를 위하여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고 해야 할까. 집에서 혼자 읽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는 일, 즉 독서 토론회에 참여한지 6개월이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시작해 지금은 학교를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독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도서관은 친목이 아니라 침   묵의 공간이, 독서실이 되었다. 독서에서 행위는 배제됐고, 책을 읽을수록 마음의   양식이 살찌니 정신의 비만이 우려된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정열과 혁명의 책   도 혼자 읽는 조용한 독서의 대상일 뿐이다. 내가 읽은 책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노동이나 자본, 탈핵 같은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책을 혼     자 읽으면 뭐하나.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 그 교양을 쌓아서 어디에 쓰지? 그것     이 삶을 더 비참하거나 힘들게 만들지는 않는가.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게 느껴지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특히 계급, 세계화 같이 거대한 담론을 다룬 책이라면 그 강도가 훨씬 심해지는데, 알아봐야 씁쓸한 이물감만 커질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옛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착각)라는 심보선 교수의 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함께 읽는다면 다르다.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때로는 날선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의기투합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장대한 행동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나와 다른 성별, 나이, 지역의 사람과 토론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과 사고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생각, 나의 일상, 나의 주변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모든 것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혼자 읽는 것이 나와 내가 판단한 저자의 모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 소통이라면 함께 읽는 것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들 각각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들이 만들어내는 다대다(多對多)’ 소통이다. 토론의 인원이 5명이라면 그 5명에 더해 그들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 5명이 더해져 10명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토론 속에서 경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난다. 이택광 교수는 프랑스 철학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활발하고 자유로운 지식인 공동체를 들고 있다. 이 공동체의 가운데에는 에콜 노르말 대학이 있었고, 거기에는 루이 알튀세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에콜 노르말과 알튀세르가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알튀세르가 한 일은 학계의 지식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연 것뿐이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을 지칭해서 개념의 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과학과 철학의 개념들이 서로 부딪히고, 예술과 정치학이 서로 조우하는 갈등과 종합의 과정이 이런 초청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철학자로 언급하는 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 또는 조르지오 아감벤 같은 이론가들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통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이런 사실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철학에서 수학〮철학〮정치〮예술〮신학, 심지어 사랑까지도 공평하게 자신의 입장과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콜 노르말의 분위기는 지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성차의 한계도 넘어서는 사상의 용광로였다고 발리바르는 회상한다. 이런 유니섹슈얼이라고 부름직하다는 발비라브의 말에서, 새로운 사상이 출현 할 수 있는 조건은 기존의 한계들을 극복하는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물론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토론회가, 그 외의 수많은 토론회들이 과거 개념의 당에 비하면 규모와 수준에 비하면 한참 모자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적인 한계와 성차의 한계를 넘어서 함께 얘기를 나누고 사유하는 정신만은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택광 교수가 같은 책에서 “(인문학이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비판적 사유는 푸대접을 받는 상황에서)막연하게 인문학의 가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위치한 곳에서 나의 깜냥으로 나름의 지성의 네트워크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읽읍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참고

아직도 책을 혼자 읽으시나요?,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자음과모음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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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천재적인
베네딕트 웰스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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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 <거의 천재적인(fast genial)>은 베네딕트 웰스를 가리킬 때 필요한 수식어다. 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한 명의 인생을 그려냈다. 여느 여행처럼 순간의 즐거움도 행복함도 있지만, 그에게는 인생 전부를 건 여행이다. 프랜시스는 지금 인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세상의 똥구멍에서

 

 어머니가 라이언과 이혼한 후 프랜시스와 어머니는 클레이몬트에 정착했다. 그곳은 선전 팸플릿에서 뉴저지 주의 중심부에 위치한, 장래가 유망하고 발전도상에 있는 도시지만 다르게 표현하자면,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세상의 똥구멍에 있는 도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트레일러가 그의 집이다. 어머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반년 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프랜시스는 루저. 클레이몬트의 트레일러에서 살고, 운동신경이 좋아 레슬링을 했었지만 이내 그만두었고, 학교성적은 하위권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다. 운이 좋아 회복될 수 있다 해도 완쾌는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너절한 남자들, 조울증, 입원, 퇴원이라는 악순환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p33).

 학교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자는 아무도 없다. ‘루저라고 놀림 받기 일쑤다. 그럴수록 프랜시스의 내면에는 무언가 자라나고 있었다. 어떤 물건을 부숴버리거나 누군가를 패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그럴 때마다 주변을 한 바퀴 달리거나 귀청을 찢을 만큼 시끄러운 음악을 들었지만 허사였다. 그의 내면에는 어떤 낯선 것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강해졌다(p80).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일까, 혹은 삶에 대한 허무일까.

 

앤메이 가드너와 출생의 비밀

 

 삶의 목적도 이유도 갖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프랜시스의 삶에 앤메이 가드너가 들어온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머니가 입원한 정신병원에서였다. 프랜시스는 한 눈에 반했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이야기하며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엄마가 남긴 편지를 발견했다. 자신의 모든 과거가 담겨있었다. 프랜시스는 자신이 시험관 아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백만장자 먼로의 유전자 엘리트층을 길러낼 계획에 의해 태어난 아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돈을 받고 정자를 제공했고 어머니는 돈을 받고 아이를 낳아 기른 것이었다. 정자를 제공한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고, 첼로를 멋지게 연주했고, 아이큐가 170이 넘는, ‘기증자 제임스라는 가명의 남자였다.

 프랜시스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회이기도 했다. 친아버지가 정말로 그러한 사람이라면, 그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은 지금의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 잘나가는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당장에 앤메이 그로버와 함께 친아버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클레이몬트에서 시작해 뉴욕,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를 지나 티후아나에 이르는 여행이 시작됐다.

 

 그들은 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이 뉴욕 시내를 빠져나가는 동안 프랜시스는 손가락으로 조수석의 글러브 박스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드는 여행이었다. 이 제임스라는 정자 기증자가 어느 고독한 대학 교수인지, 속물이 된 컨트리클럽 회원인지 아니면 애정이 넘치고 가정적 인물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프랜시스는 친아버지를 찾아내기만 하면 그가 자신을 이 지겨운 곳에서 꺼내주리라 예감이 들었다. 그것만은 아주 확실해. (p138)

 

친아버지와 카지노, 그의 유일한 희망

 

 아버지를 찾는 여행 도중에 그들은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다. 프랜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지노로 향한다. 라이언이 준 5,000달러를 종잣돈 삼아 도박을 시작한다. 시작과 동시에 몇 판을 내리 이겨 꽤 큰돈을 땄지만, 종내 모든 돈을 잃고 만다. 빈털터리가 된 그들은 그로버의 부모님께 돈을 얻어 가까스로 여행을 이어간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확률 없는 도박에 몰두하는 프랜시스가 한심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트레일러에서의 가난한 생활, 이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입대를 잠시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혼자서 먹고살기에 넉넉하지는 못해도 부족하지 않은 돈을 벌 수 있겠지만 정신병원에 있는 엄마까지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때 마침 친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됐고, 자신과 어머니 인생의 방향을 바꿔줄 변곡점을 될 것이라는 기대로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에게는 친아버지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희망은 산산이 부서진다. 하버드를 졸업한 똑똑한 엘리트일 것이라고 상상했던 그의 친아버지는 티후아나에서 막노동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프랭클린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루저였다

 아버지의 실체를 알게 된 프랭클린은 좌절한다. 자신을 클레이몬트의 지겨운 생활에서 꺼내줄 구원자, 친아버지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실망만 안은 채 그들은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아직 한 가지 탈출구가 남았다. 카지노다. 한 번만 제대로 터지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남은 전재산을 털어 도박을 시작한다. 거듭 승리를 거두었고 한 번만 더 이기면 100만 달러를 얻을 수 있다. 검은색에 배팅했다. 만약 공이 지금 검은색 칸에 굴러 떨어진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바꾸어놓을 수 있다(p429). 그렇게 되면 앤메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할 것이다. 어머니의 삶도 달라질 것이다. 빨간색이 나와 돈을 잃었을 때도 생각해 본다. 그러면 내일 군대에 지원할 것이고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어쩌면 브래드 제닝스의 형처럼 전쟁터에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어 돌아와 죽을 때까지 절망적인 삶을 근근이 이어갈지도 모른다(p430).

 

 공이 마침내 멈출 때까지의 그 몇 초 동안 프랜시스는 세 가지의 삶을 동시에 살았다. 트레일러 정착촌에서의 삶, 샌프란시스코나 이라크에서 펼쳐질 새로운 두 가지 삶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는 부와 행복, 가난과 죽음 사이를 오갔다. 그것은 단 하나의 나라, 즉 이 나라에서 영위할 수 있는 세 가지 삶이었다. 동시성이 주어진 불가사의한 순간이었다. 이 세 가지 삶 중에서 두 가지는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그는 자신의 숨소리와 공이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고, 머릿속으로 샌프란시스코 또는 이라크, 앤메이와 존 또는 고독한 생활, 삶 또는 죽음을 그려보았다. (p431)

 

 딸깍하고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프랜시스는 조용히 눈을 뜬다. 공이 멈춘 곳은 검은색 칸일까 빨간색 칸일까. 그의 인생 굴곡은 새로운 변곡점을 만나 위로 올라가게 될까, 아니면 더욱 가파르고 빠르게 아래로 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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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밥상 - 먹지 않을 수 없다면 정확히 알고 먹자
박지현.서득현.배관지 지음, 배나영 구성 / 이지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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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밥상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음식은 개인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개인이 직접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요리를 하는, 그러니까 자연에서 시작해 음식으로 만들어지고 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시기에서 모든 과정은 가려진 채 음식이 되고 그것이 나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만을 볼 수 있는 시기로 넘어왔다.

 사람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다.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되는 식품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자기 앞까지 왔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잊을만하다 싶으면 터지는 음식 관련 사고 때문에 그 불안감은 증폭된다. 자연스럽게 관심은 불안감을 없애주는 식품으로 향한다. 비싸더라도 화학적 과정이 더해져 만들어진 식품이 아닌 흔히 유기농, 천연 식품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찾는다. 식품회사들은 이에 발맞춰 너도 나도 유기농, 천연 식품을 내놓고 또 이러한 전략은 그렇지 않은 식품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높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 제품을 찾게 만든다.

 

우리가 좋다고 알고 있었던 것들, 안 좋다고 알고 있었던 것들

 

 한 번 생각해보자. 유기농 설탕은 보통 설탕보다 좋을까? 천연, 자연재료는 더 좋을까? 반대로 식품첨가물과 MSG는 무조건 안 좋을까? 나 역시 유기농, 천연이라는 말이 붙으면 보통 식품보다 왠지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왠지 식품첨가물과 MSG가 들어있는 음식들은 몸에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왠지라고 했다. 그게 왜 좋은지, 왜 나쁜지 생각해보지 않은 채 출처조차 불분명한 얘기로 그렇게 지레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절대 아니다. 유기농 설탕과 정제 설탕의 영양 성분은 큰 차이가 없고, 유기농이라고 이름 붙은 식품이 완전한 유기농이 아닐 수 있고 천연식품은 오히려 정제되지 않은 독성 때문에 인체에 해를 입힐 수 있다. 식품첨가물이 없다면 지금 싼 가격으로 먹고 있는 음식들을 훨씬 더 비싼 돈을 주고 먹어야 하고 산다 하더라도 얼마 못 가 상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MSG의 성분은 육류, 채소, 닭고기 같은 단백질 식품에 자연적으로 들어있는 아미노산의 한 종류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있는 음식에 들어있는 것이다. MSG가 인체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수많은 실험에서 검증됐다. 미국 국립연구원은 미국의 나트륨 섭취를 줄이기 위한 전략중 하나로 소금을 대체해 MSG의 사용을 권장할 정도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음식은 약이 아니다. 특정 음식을 몇 번 먹는다고 해서 건강이 갑자기 좋아지지 않고 그 음식을 안 먹는다고 해서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지 않는다. 또한 좋은 식품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영양소는 다른 식품에서도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좋은 성분으로만 가득한 식품이라도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건강에 안 좋다. 결국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품을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먹느냐이다. 365일 좋은 음식만 먹는 부자들 중에도 비만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책임을 음식의 탓으로 돌린다.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다. 골고루 적당히 먹고 꾸준히 운동할 것,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단지 귀찮아서 편법을 찾을 뿐이다.

햄버거에 대한 옹호

 

 대전선병원 국제의료원 원장 윤방부 교수는 유해식품이라는 누명을 쓴 햄버거를 변호한다. 그에 따르면 햄버거는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좋은 음식이며 제대로만 먹으면 건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햄버거는 빵, 고기, 채소로 이루어진다.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을 한 번에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이다. 게다가 1일 기준치 콜레스테롤을 넘으려면 햄버거 10개를 먹어야 한다. 빅맥 1개에 들어있는 콜레스테롤은 삼계탕, 짜장면, 순두부 백반에 들어있는 콜레스테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적다.

 우리 모두 햄버거를 먹자. 요즘 군대를 소재로 한 방송 덕에 군대리아가 사람들의 입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고 군대리아와 비슷한 햄버거가 출시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다. 군대에서는 아침마다 우유가 한 개씩 나온다. 진정한 군대리아가 완성되려면 반드시 우유와 함께 먹어야 한다. 모든 군인들은 군대리아를 우유와 같이 먹는다. 그리고 그때 햄버거에는 없는 칼슘이 더해져 군대리아는 진정한 완전식품이 완성된다. ‘군대리아는 완전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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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은 맛있다
강지영 지음 / 네오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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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만큼이나 다양한 해석과 이론들이 난무하는 학문 분야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는 당사자에게만 보이는,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꿈에 관한 수많은 이론 중 욕망의 발현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꿈을 통해서라면 다시 가고 싶은 과거의 삶, 간절히 기대하는 미래의 삶, 심지어 질투 혹은 부러움의 대상인 타인의 삶으로도 갈 수 있다. 영화 <금발의 초원>의 주인공 닛포리가 60년을 초월해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인 대학교 때로 시간여행을 하듯, <하품의 맛있다>의 주인공 박이경은 자신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단아름다운의 삶을 여행을 하게 된다.

 

너무나도 다른 둘, 박이경과 단아름다운

 

 박이경과 단아름다운, 둘은 지극히 평범한 이름과 특별한 이름의 차이만큼이나 정반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박이경은 특수청소용역 회사에서 일한다. 사망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청소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안타까움, 무서움, 불길함을 한 순간에 없애버리고도 남을 지독한 악취가 풍기고 쓰레기들이 널브러져있다. 다른 일을 안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커피숍이나 편의점처럼 깔끔하고 편한 일이 싫을 리 없다. 하지만 작은 키와 못생긴 얼굴은 항상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빨리 그리고 많이 돈을 벌어야 한다. 학자금대출은 이미 삼천 만원을 넘어섰다.

 남들처럼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도움은커녕 보험료 체납으로 수급 대상자에서 누락된 아빠의 병원비와 가족의 생활비까지 충당해야 했다. 아빠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지고 있고 엄마는 간병인 교육을 수료해 아빠 병실의 다른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이다. 인정사정없이 얽힌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 단아름다운은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번 부모님이 계시고, 명문대의 음악과를 다니고, 돌아다닐 때면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만한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갖고 있다. 누구라도 부러워할만한 인생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만들어준 녹즙을 마시고, 엄마와 함께 손톱관리와 마사지를 받는다. 점심에는 친구를 만나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떤다. 저녁에는 만나달라고 하는 많은 남자 중 한 명을 골라 데이트를 한다. 걱정 없어 보이는 그의 일상이다.

 

치즈케이크의 맛

 

 전혀 다른 둘의 인생은 꿈을 통해서 뒤바뀐다. 마치 왕자와 거지가 뒤바뀐 것처럼 박이경은 단아름다운의 삶을 단아름다운은 박이경을 삶을 살게 된다. 언뜻 보기엔 단아름다운에게는 찝찝하고 끔찍한 꿈일 테고 박이경에게는 황홀하고 행복한 꿈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온실의 화초처럼 아무런 상처 없이 예쁘게만 보이는 단아름다운의 인생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뿌리는 잘려나갔고 썩기 일보직전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겉모습은 상처투성이인 내면을 가리기 위한 포장일 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엄마의 강요로 살인을 저질렀다. 박이경이 청소했던 집에 살던 여자를 죽인 것도 단아름다운이었다.

 박이경에게 단아름다운은 환상과 동경의 대상, 치크케이크 같은 존재다.

 

 나는 십수 년 동안 치즈케이크에 대한 환상을 품어왔다. 물론 그 사이 나는 몇 번이나 치즈케이크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매달 적으나마 용돈이 생겼고, 프랜차이즈 제과 점에 가면 단 돈 몇 천 원에 살 수 있는 것이 치즈케이크였다. 하지만 나는 제과점에 갈 때마다 케이크 진열대를 외면하고 슈크림이나 페이스트리를 계산대로 가져갔다. 맛이 있는 케이크의 한 종류일 거라는 애초의 상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없으면 안 되는 궁극의 요리로 진화해갔고, 종래에는 만에 하나 맛이 없을까 봐 맛볼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갔다. 스무 살 생일 날, 엄마의 손에 그것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p.205-206)

 

 동경을 넘어 궁극의 대상이 된 치즈케이크, 그가 처음 맛본 치즈케이크의 맛은 어땠을까. 생각했던 그대로의 맛이었을까. 아니면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릴 만큼 실망을 안겨주는 맛이었을까. 스무 살의 생일 때의 치즈케이크처럼 그의 손에 단아름다운의 인생이 주어졌다. 환상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그는 꿈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환상이 깨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실망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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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화양연화 - 책, 영화, 음악, 그림 속 그녀들의 메신저
송정림 지음, 권아라 그림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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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양조위와 장만옥이 출연한 영화의 제목으로 많이 알려진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거창한 표현 때문인지 나의 추억은 화양연화에 끼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화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열정적인 사랑과 생명을 담보로 하는 모험 정도는 해야 감히 화양연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내 주눅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주눅들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로 영화 속 한 장면인 <화양연화>에 나오는 양조위와 장만옥의 사랑은 따지고 보자면 불륜이고 열정적인 사랑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서로 너무나 좋아하지만, 정말로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불륜이라는 현실에 가로막혀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이다. 그래서 그렇게 국수만 먹어댄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의 저자 송정림 씨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가 본다면 꼭 한 번 가고 싶어지는 시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리 거창한 사건이 있었던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일상의 시간입니다.’(p.222)라고 말한다. 양손에 하나씩 부모님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놀이공원을 갔던 날, 처음으로 애인과 손을 잡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던 순간,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동기들과 함께 초코파이를 먹었던 찰나, 누구나 나도 그랬었지하고 공감할 만큼 한 번쯤은 경험했던 순간일 것이다. 이것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인생의 화양연화는 그리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무심코 스쳐가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일상에 사람의 향기, 즉 사랑이 더해지면 모든 순간이 화양연화가 된다. 놀이공원에서 느꼈던 부모님의 따뜻한 온기,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전해오는 설렘, 초코파이 속의 마쉬멜로우 보다 훨씬 끈끈한 전우애, 이 모든 것들이 사랑으로 완성된다. 우리의 몸이 각각의 원소로 환원되는 것을 막는 것은 사랑이라고 노래한 전혜린 작가의 시처럼, 어쩌면 사랑은 뒤돌아서면 잊혀질 뻔한 순간의 사소한 기억들을 잊혀지지 않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일지 모른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할 때

탄소, 수소, 질소, 산소, , 기타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전경린

 

 결국 송정림 작가가 이 책을 통해 가장 하고 싶었던 한 마디는 사랑하자가 아니었을까. 혹하자, 빠지자, 사랑하자. 설령 영화 <화양연화>에서 장만옥과 함께한 과거의 추억이 묻은 장소를 다시 찾아왔을 때의 양조위처럼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하게 될지라도, ‘최선을 다해 좋은 기억을 만들기를…. 그 기억은 최선을 다해 잊지 말기를….’(p.174)

 

Ps. 영화 <화양연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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