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랑권 전성시대 창비시선 261
윤성학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양정규 잠적 해프닝을 돌아보며 

 얼마 전 친구들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오전 강의 때 친구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강의에 빠지지 않기로 유명한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카카오톡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전화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평소에 자살을 운운했던 터라 친구들은 점점 불안해졌다.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30번은 했을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오후 세시 무렵 그는 전화를 받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무사한 것은 다행이지만, 이 웃지 못할 소동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건은 그 친구가 오랜 시간 동안 전화를 안 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것에 대한 추측이 계속 확대되었고 실종 혹은 죽음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실종의 걱정으로 이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친구가 평소 자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와 비슷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걱정한 일 말이다.

 노명우 교수는 『텔레비전 , 또 하나의 가족』에서 미디어를 도구-미디어환경-미디어로 분류했다. ‘도구-미디어는 말 그대로 단순히 도구로만 쓰이며 일정한 문화적 형식을 만들지 못한 미디어를 가리킨다. 이와 달리 환경-미디어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형식을 창출하는 미디어를 의미한다.

 

 도구-미디어는 개별 인간이 개인적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만, 환경-미디어는 마치 공기처럼 개별 인간이 선택할 수 없다. 만약 공기라는 환경을 인간이 거부하면 생명체로 살아갈 수 없듯, 환경-미디어화된 도구-미디어는 개인이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되도록 만드는 힘을 지녔다.

노명우,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48

 

 핸드폰과 최근 등장한 스마트폰은 환경-미디어에 가장 적절한 예다. 스마트폰에 의해 바뀐 우리의 모습은 무수히 많겠지만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부분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일 것이다. 스마트폰 속 대화가 때로는 만남을 대신하며 만날 때도 스마트폰을 통해서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인간관계가 스마트폰으로 시작해서 스마트폰으로 끝나는 것이다. 쉴새 없이 울리는 메시지 알람 때문에 스마트폰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해도 쉽사리 스마트폰을 거부할 수 없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없이 하루만 살아봐도 이러한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곧 나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존재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스마트폰을 끌 수 없다. "외양이 본질보다 더 무겁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고 부른다"(주창윤, 옷걸이에 걸린 양, '옷걸이에 걸린 양')는 시 한 구절은 더 없이 옳다.

 스마트폰이라는 외양에 밀려 나의 본질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스마트폰에 찍혀 있는 전화번호와 카카오톡 아이디가 나를 증명하고, 프로필 사진과 문구가 지금 나의 감정을 보여준다.  이번 소동처럼 그것들에 응답하지 않으면 나는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 내가 싫어하는 계절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

 

갈빗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신발 담당과 시비가 붙었다

내 신발을 못 찾길래 내가 내 신발을 찾았고

내가 내 신발을 신으려는데

그가 내 신발이 내 신발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

그러므로 나는 말하지 못한다

이 구두의 주름이 왜 나인지

말하지 못한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꽃잎 속에 고인 햇빛을 손에 옮겨담을 때,

강으로 지는 해를 너무 빨리 지나치는 게 두려워

공연히 브레이크 위에 발을 얹을 때,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서며 그의 문지방을 넘어설 때,

손 닿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을 잡고 싶어

자꾸만 발끝으로 서던 때,

한걸음 한걸음 나를 떠밀고 가야 했을 때

그때마다 구두에 잡힌 이 주름이

나인지

아닌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나임을 나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친구에게는 어떻게 연락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며칠 전 소동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은 내가 실종됐는지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4
김선욱 지음 / 자음과모음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자이야기, 고전으로 가는 우회로

 

 

 이것은 책 한 권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권의 책,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일 것 없이 고전은 위대하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무 책이나 짧게는 몇 십 년, 길게는 몇 백 년 동안 꾸준히 회자되고 읽힐 수 없다.

 이제 막 책에 흥미를 붙인 사람을 다시 책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고전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고전의 가장 큰 문제는 읽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전에 대한 농담으로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보지 않은(못한) 책이라는 말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외감이 느껴지는 표지와 제목, 웬만한 책 몇 권에 버금가는 쪽수와 무게, 읽기를 도전할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우회로.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다. 실제로 해설서를 먼저 읽고 그 다음 원저를 읽는 일은 바로 원저를 읽는 일보다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원저로 가는 길이 산적들이 우글거리는 높은 산을 넘어야만 하는 험난한 길이라면 해설서를 통한 우회로는 중간에 쉴 곳도 많고 깔끔하게 잘 닦인 길이다. 오랜 수련으로 내공이 쌓인 사람이라면 첫 번째 길로 가도 괜찮겠지만 초심자라면 두 번째 길로 가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시리즈는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심오한 이론의 핵심을 쉽게 풀어냈다.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표지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이 책을 들기 망설였던 사람이라면 잠시 조금 배웠다는, 대학생이라는 허영심 혹은 자존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는 필히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라고 공자는 말했다. 이 말인즉슨 그 중에는 어린이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모르면 어린이에게라도 배우면 되는 것이다.

 잠시 겸손한 마음으로 고전으로 가는 우회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를 펴보면 어떨까. ,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고전은 확실히 어렵긴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발터 벤야민은 외관상으로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일정한 방식이 없는 듯 보이는 미세한 문화적인 변동 속에서도 어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징후들을 독특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탐지해낸 철학자였다. 그는 종종 이야기 유형을 뱃사람 이야기와 농사꾼 이야기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우선 뱃사람 유형의 이야기는 결코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분명 그 누구도 찾아가려 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먼 곳에 대한 이야기이자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과 돌연변이, 마녀와 마법사, 늠름한 기사와 반대로 교활하고 못된 짓을 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 속에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영웅담을 경청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서로 삐걱대면서 충돌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 특히 마법에 홀린 듯 뱃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채 경청하는 그런 사람들은 결코 해보려고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감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반면에 농사꾼 유형의 이야기는 마치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 년 동안의 계절 순환처럼 또는 집과 농장, 들판에서 매일 벌어지는 지루한 일상들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하고 얼핏 보기에도 친숙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금 나는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인상 때문에, 그 친숙한 일들에 관해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 또한 하나의 착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친숙한 것들이 너무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나 거기 있어서’, ‘결코 변하지않을 듯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만큼 아주 재빠르고 단호하면서도 면밀한 음미의 눈길을 피해가는 것도 없다. 친숙한 것들은 바로 빛 속에 숨어있는데, 결국 그 빛은 친숙함 속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오해하게끔 하는 빛이다! 그러한 친숙한 사물들의 평범성은 모든 음미의 눈길을 방해하는 장막인 셈이다. 그처럼 친숙한 사물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면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적으로 무디고 아늑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타락한 판에 박힌 듯 순환하는 일상으로부터 그 사물들을 뜯어내서 분리시켜야 한다. 우선 그 사물들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스캐닝하기 전까진 반드시 무시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그 사물들이 지닌 소위 일상성이라는 의심스러운 장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친숙한 사물들이 숨기고 있는 풍부하고도 심원한 미스터리를 탐구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 사실 당신이 그 친숙한 사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곧 그 사물들은 아주 기묘하고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돌변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p19

 

그래, 역시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아니 역시 발터 벤야민이다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책을 보던 중 이 얘기를 발견하는 순간, '이건 나를 위한 얘기다', '내가 항상 기억해야 할 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는 글은 어떤 글일까?(: 재미도 없고 간지도 없는 그저 그런 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 따위의 질문을 어렴풋이 해왔었다. 질문이 어렴풋한 탓에 답도 어렴풋했다. 그러던 차에 벤야민이 했고 바우만이 멋지게 주석을 달아준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다

 벤야민은 이야기의 유형을 뱃사람의 이야기와 농사꾼의 이야기로 구분했다. 일단 뱃사람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을 발견하고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모험담은 누구라도 매료시킬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하루면 세계의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지금, 뱃사람의 이야기는 과거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힘들다

 농사꾼의 이야기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겉으로만 봤을 때 뱃사공 이야기의 매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누구나 겪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 부분에서'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일들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숙한 일들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착각을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봄에는 씨 뿌리기, 여름에는 풀 뽑기, 가을에는 수확하기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자체가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비슷한 아침을 먹은 후 똑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생활에서 어떤 발견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바우만은 바로 그 익숙함과 친숙함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음미해 볼 기회를 뺐어 간다고 말한다. 때문에 평범한 사물을 음미하고 관찰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판에 박힌 일상에서 그것을 떼어내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친숙한 사물들 속에 숨겨졌던 풍부하고 신비로운 미스터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떼어내서 친숙한 것을 다시 보라는 바우만의 말은 ‘거리 두기’, ‘낯설게 보기’와 궤를 함께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에서 이야기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몸을 씻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면대와 욕조를 우울한 나의 ‘텐션(tension)’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인스턴트 늪>),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어중간한 맛의 라면을 만드는 것에 모자라  어느 커피 전문점보다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서비스로 주는 라면가게(<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제목부터 ‘거리 두기’의 표본이다), 무술로만 생각했던 쿵푸로 축구를 하는 것(<소림축구>), 이 모두는 너무 가까이 있어 뻔해 보이는 것을 ‘낯설게 보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 또한 ‘거리 두기’를 통해서 내가 목표로 하는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기대하시라. 언젠가 블로그 혹은 다른 매체에서 내 글을 보고 ‘이 새끼 봐라. 골 때리는 놈이네’하며 킬킬거릴지도 모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두운 방 안에서 내다본 밝은 세상
김화영 지음 / 현대문학북스 / 1996년 2월
평점 :
절판


 가끔 서점이나 헌책방을 구경하고 있다 보면, 책장 귀퉁이에 영화일기’, ‘독서일기따위의 제목으로 꽂혀 있는 책들이 왕왕 눈에 띈다. 이런 책을 내는 것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글 깨나 쓴다는 사람이라면 모두 한 두 권쯤은 출판된 책이 있는 듯 하다. 물론 이렇게 보이는 것도 아등바등해야 간신히 중산층에 들까 말까한 나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기껏해야, 그것도 아주 낮은 수준의 책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소양에서 나온 것이지만 말이다.

 내에게 보이는 것은 영화일기’, ‘독서일기같은 책들뿐이지만, 실제로는 클래식일기’, ‘오페라일기같은 책이 나는 미처 보지 못한 곳에 수십, 수백 권 쌓여있을 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영화일기’. ‘독서일기같은 책을 쓴 사람들 역시 그들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책 읽기와 영화 보기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책을 쓸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단돈 만원이면 새 책을 살 수 있고 그것마저 없다면 헌책방을 가면 된다. 혹 헌책을 살 여력마저 안 된다면 모든 책을 공짜로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을 이용하면 된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로 만원이면 한 편을 볼 수 있고,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사탕 하나 가격에도 못 미치는 140원으로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을 수 있다.

 김화영 씨가 쓴 책의 제목 <어두운 방안에서 내다본 밝은 세상>은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어두운 방안에서’ (물론 그 분은 이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140원을 내고 영화를 다운 받아 보며 수 많은 감독과 배우와 스텝들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역작이 그려내는 밝은 세상내다본다는 것이다.

 반면에 고급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오페라나 클래식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두운 방안에 있을 필요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앞에 아트 혹은 예술이 꼭 들어가는 휘황찬란한 극장에서 에서 오페라와 클래식 연주를 감상한다. 어릴 때부터 늘 보고 듣고 자라왔고 십 만원을 호가하는 입장권 가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로 밝은 세상, 나에게 오페라를 듣고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은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다. 어릴 때 들은 것이라고는 TV의 가요프로에 출연하는 가수들뿐이었고 지금은 기타를 뚱기고 드럼을 두들기는 밴드들의 노래들뿐이다. 미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린 시절 집에서 클래식을 들어본 적도 없고 오페라는커녕 미술관을 가본 기억이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 역시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새 따라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과 엄청난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나마 어두운 방안에서 영화나 보고 서점과 헌책방을 기웃거리며 책만 뒤적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지게 된 것을. 클래식이니 오페라니 하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없으니 책과 영화라도 열심히 볼 뿐이다. 그것이 나름의 문화자본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비록 누군가 오페라의 유령이나 카라얀 같이 어디선가 한 두 번 주워 들어봤을 뿐인 것들을 물으면, 깨갱하고 주눅들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폭력을 바라보는 우회로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subjective인 것과 객관적objective인 것으로 구분한다. 주관적 폭력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즉 명확히 식별이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른 폭력을 말한다. 객관적 폭력은 두 가지로 다시 나뉜다. 첫 번째는 부르디외가 묘파했듯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징적symbolic 폭력이고 두 번째는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의 작동으로 발생하는 구조적systematic 폭력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은 눈에 잘 보이는 반면 객관적 폭력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주관적 폭력은 이미 구조적 폭력이 내재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주관적 폭력은 징후일 그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구조적 폭력이라는 배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관적으로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돼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폭력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의 정반대이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악명 높은 암흑 물질과도 같은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25

 

 지젝은 우리에게 폭력에 대해 성찰하는 우회로를 안내한다. 그것의 시작은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다. 폭력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과 희생자에 대한 감정이입은 객관적 사실을 판단하는 사고를 마비시킨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필요하지만 이는 자칫 도덕적 잣대로만 사건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식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겉모습만 살짝 바뀔 뿐 같은 뿌리에서 다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진실truth과 진정성truthfulness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젝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폭력, 그 보이지 않는 배경

 

 지젝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언급한다.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구글, 아이비엠 등이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다. 그들은 스마트하다. 창의적인 기업가로 많은 돈을 벌고 누구보다 많은 기부를 한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인 그들의 이미지를 한 꺼풀만 벗기면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p47)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그들은 공리공론적 접근을 싫어한다. 그들이 보기에, 착취당하는 단일한 노동계급 같은 건 지금 없다. 아프리카의 기아, 무슬림 여성들이 겪는 고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폭력과 같은, 해결이 시급한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는데 케케묵은 반제국주의 따위를 앞세우며 개입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대신 우리 모두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들과 정부와 기업이 공동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고, 중앙 정부의 도움에 기대는 대신 상황을 개선해나가기 시작하고, 이름표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도 관습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위기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반대 투쟁 같은 상황이다.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7

 

 그들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역설은,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 먹고 살아가는 뱀과 같다는 것이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온갖 독점으로 경쟁사를 파산시키거나 합병하고 제 3세계의 노동력을 싼 가격에 이용해 돈을 번다. 그 돈으로 다시 그들에게 기부를 한다. ‘지독한 사업가모습은 자선 행위와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인도주의의 좌장의 모습으로 감춰진다.

 그들이 막대한 기부를 하는 것은 개인적인 특성에서 기인한 일이 아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의 순환이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경제적 관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행위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하여 균형을 다시 잡아가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 국가의 주도에 의한 강제적 재분배를 교묘히 비껴가는 것이다.

 

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큰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한다면 작은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역시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손길에 우려를 표했는데,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든 자원봉사자든 인도주의적 손길을 전하는 사람이 배제의 사슬을 단단히 하는 중요한 고리라는 것이다. , 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난민을 배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요원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겉으로는 인도주의적 행동이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배제의 목적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폭발을 유발하는 파괴적인 원한을 줄이기 위해 인도주의적손길로 그들이 사는 곳을 비교적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놓고, 자기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담장을 높이 쌓아 잠재적 범죄자들과 분리하는 것처럼 무장을 한 경비원들로 하여금 철저히 그들을 격리 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부패[인간쓰레기들]의 불쾌한 악취가 원주민들의 거주지에 도달하지 못할 만큼 먼 거리,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거처인 임시 수용소의 위치를 선정하는 주요 기준이다. 그런 장소가 아닌 곳에 있는 난민은 장애물과 골칫거리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 들어간 이들은 잊힌다. 난민을 그런 곳에 가둬 놓고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점에서, 그런 격리를 궁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일부의 연민과 또 다른 일부의 증오는 서로 협력해 난민을 멀리 격리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72

 

이는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을 함께 있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 해로운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고자 하는 압도적인 바람뿐만 아니라 도덕적 올바름righteousness을 원하는 절실한 바람도 충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인 것이다.”(P. 72)    

 

복지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앞서 말했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모습은 과거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지젝이 언급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가 대표적인 예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고 교황에 의해 성인 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주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그 자신이 다스렸던 콩고의 자연자원 착취라는 대규모 경제계획이 낳은 파국적 결과들을 적당히 중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진실한 인도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콩고는 그의 개인 영지였으니까!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1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복지국가의 형성과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업의 복지에서 노조들이 주창하는 것들 중 핵심은 조합원의 몫을 늘리는 것이다. 그 사이에 비정규직의 권리와 복지는 들어설 틈이 없다. 좀 더 넓게 국가적 차원을 보자면, 잘 갖춰진 사회안전망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박노자 교수는 한 칼럼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당연히 노르웨이의 최대 기업인 스타트오일 (국영 석유회사)의 노조는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조합원의 임금 인상과 복지” 등을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기업이 이윤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컨대 자연환경 파괴적인 로포텐 섬 (관련링크) 근방의 유전 개발 문제라든가 알제리아와 같은 최악의 독재국가에서의 자원 “개발” (사실상 약탈) 참여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환경 본위의, 국제연대 본위의 입장을 취하겠습니까?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조직노동과 자본은 비록 각각의 “몫”을 놓고 늘상 긴장을 하고 있지만, 또 동시에는 ()노르웨이 운영에 있어서는 “동업자”이기도 합니다. 노르웨이 자본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앙골라나 방글라데시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공범”은 아닐까요?

노르웨이의 굴지의 재벌인 통신사 텔레눌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안전장치없이 일해야 하는 13세 아이들에게는 텔레눌의 “해외 경영”을 반대한 적도 없는 그 노조는 과연 무엇일까요?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레디앙칼럼)

 

 물론 콩고의 사람들을 대학살 했던 레오폴드 2세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소 과격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원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역설로 들리지만, 실은 가장 내구력이 있고 가장 튼튼한 자본주의는 바로 다수를 공범이랄까, 배부른 감옥의 “수인 겸 간수”랄까 하여튼 체제의 순량한 “일분자”로 만드는 복지자본주의입니다라는 박노자 교수의 말을 되뇔 필요가 있다.

 

환상은 금물

 

 여기까지 전개된 생각에 대해 누군가는 냉소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냉소가 아니라 의심이라고, 그리고 지젝의 조언대로 주저 않고 바로 대답하겠다. “!, 바로 그겁니다”. 어설픈 열정과 온정주의은 주관적 폭력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들고 좋은의도가 오히려 객관적 폭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폭력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려야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생각은 분명히 무기력하지만 생각이 없는 행동은 효력이 없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도덕적 부패와 인간적 고통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38

 

 

참고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후마니타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 레디앙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리뷰는 확실히 공들여서 쓴 느낌이 드는군요. 이 책 50% 세일할 때 살까 말까, 하다가 적립금 한도가 약간 넘쳐서 책 하나를 빼다가 그만 이 책을 뺏는데 좀 아쉽네요. 아직도 반값 하나 모르겠네요..... 알아봐야겠다...

오, 아직도 반값이네 !!! 그나저나 이런 글이 좀 핫 코너에 소개되어서 널리 읽혀야 하는데 좀 아쉽습니다.

까레이 2014-01-04 21:09   좋아요 0 | URL
오미 감사합니당ㅋㅋㅋㅋ 쓰다보면 언젠가 실리겠죠??ㅋㅋ
강력추천입니당 주제도 좋고 역시 지젝 이빨(?) 잘터네요ㅋㅋ 농담, 문학, 소설 다 끌어다 쓰는듯해요ㅋㅋ
근데 뒤로가면서 저한테는 좀 어렵더라구요
그놈의 라캉과 헤겔ㅋ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21:48   좋아요 0 | URL
라캉 쉽게 이해하기 힘들죠. 라캉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이해해야 하고... 뭐 그런 족보를 캐야 하니, 더군다나 지첵 번역ㅇ 쉬지가 않은 가 봅니다.
하여튼 반갑이니 얼릉 사두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