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많이 들어 봤지만 정작 만나본 적 없는 사람에 대해 갖게 되는 호기심이 있잖아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다들 그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는 걸까요.
드디어 만났네요. 그가 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건 처음이라 뭔가 설렜네요.
발터 벤야민의 《고독의 이야기들》은 벤야민이 쓴 짧은 형식의 다양한 글을 모은 작품집이며, 국내 초역이라고 하네요.
이 책에는 꿈과 몽상, 여행, 놀이와 교육론이라는 주제로 마흔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주제만 놓고 보면 딱히 연관성이 없는데, 벤야민의 글과 함께 수록된 벤야민이 사랑한 모더니즘 예술가 파울 클레의 회화 작품들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길이 생기는 느낌이 들어요. 1부의 글들은 꿈과 몽상에 관한 내용으로 벤야민이 초기에 집필했으나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나란히 보이는 파울 클레의 그림과 묘하게 닮았어요. 똑같은 그림이라고 해도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듯이, 벤야민의 글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비정형의 모습을 지녔어요. "밤중에 어둠 속에서 깼을 때, 나에게 세상은 말없이 던져진 단 하나의 질문일 뿐이었다." (85p) , "··· 그때 나는 알아버렸던 것이다. 깨어남으로써 과녁을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내가 어린아이로서 경험했던 달의 통치령은 더 아득한 세상 시간이 들어서면서 폭망했다는 것을." (90p), "멀리 떠났다가 여행 경험으로 검게 변한 채 돌아오는 새 떼, 소리 없이 나는 새 떼는 나 자신이었다." (177p), "그렇게 한참 걷다가 또 한 번 발길을 돌렸을 때 나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내가 멈춰 선 것은 그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발견해주기 직전, 다시 발길을 돌렸을 때였다. 먼 나무들 위로 천천히 떠오른 것이 달이었다는 것, 내가 눈여겨보았던 지상의 불빛은 달빛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187p) , "내가 운명과 화해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는 일이라니, 정말이지 참기 힘든 유혹이군요." (282p), "··· 풀기 내기에서 이 시대의 비참함, 무법함, 불안정함을 판돈으로 걸 수 있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뿐이라는 것." (300p)
짧은 글로 나뉘어져 있지만 실상 분류할 필요가 없는 사유의 흐름이라고 느꼈어요. 그림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한 이야기 속에서 잠들어 있는 내면 어딘가를 깨우는 것 같았어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그때 왜 그랬을까라는. 지상의 불빛이 과연 그냥 불빛인지, 아니면 달빛인지는 스스로 발견할 일이니까요. 발터 벤야민의 글들은 그저, 우리를 살짝 흔들어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