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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24년 7월
평점 :
"이 글은 순전히 허구이므로 등장인물들은
실존인물들과 어떤 연관도 없음을 밝혀둡니다." (5p)
흔하게 보던 문구인데 이번 책에서는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소설이라는 장르가 원래 작가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서 허구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지만 대부분 현실 세계를 보여주고 있잖아요.
누구나 다 아는 재료를 가지고 완전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실제로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 (1992년) 소설 속 주인공의 모델이 특정 인물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에 작가의 입장을 밝히는 차원에서 문구를 넣었다고 하네요.
《살인자의 건강법》은 아멜리 노통브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자 데뷔작이라고 해요. 첫 작품을 발표하자마자 '천재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프랑스 문단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 작품으로 르네 팔레상, 알레 푸르니에상 등을 수상했다는 소개글을 읽으면서 기대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죠. 그만큼 인정받은 작품이라는 걸 알고서 첫 장을 펼쳤고, 주인공인 대문호 프레텍스타 타슈라는 인물에게 빠져들고 말았네요.
우선 프렉텍스타 타슈가 어떤 인물인지, 간략한 소개가 필요해요. 여든세 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스물두 권의 소설을 출간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현재는 소박한 아파트 일층에서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어요. 비만인 데다가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그가 갑자기 화제의 인물이 된 것은 두 달 뒤에 사망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에요. 타슈 선생이 걸린 병은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이라는 연골암으로 19세기에 처음 발견되었다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뜬금없이 이 희귀한 암에 걸렸다고 하니 대중들의 관심과 함께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게 된 거예요. 소설은 타슈 선생이 허락한 기자들과의 단독 인터뷰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펜보다 더 날카로운 타슈 선생의 혀를 만날 수 있어요. 마치 혓바닥으로 싸우는 배틀 현장을 관람하는 느낌이랄까요. 흡사 펜싱 경기처럼 상대방 기자의 허를 찌르고 있지만 진짜 공격 대상은 작가 자신이 아닌가 싶어요. 스핑크스가 사람들을 상대로 수수께끼 내기를 시작하여 이를 맞추지 못한 사람을 잡아먹듯이, 형편없는 기자들을 혀로 압살하던 타슈 선생 앞에 강력한 상대가 등장하면서 흥미를 더해가네요. 조금씩 가열되다가 끓는점에 도달하듯, 많은 생각들을 녹여버렸고 형태를 바꾸어 멀리 퍼져가네요. 이 소설이 당신에게 무엇을 전달하게 될지, 그건 반드시 읽어야만 확인할 수 있어요.
"내가 이렇게 유명해진 건 아무도 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오."
"역설이시겠지요!"
"천만에. 그 한심한 사람들이 실제로 내 책을 읽으려고 애를 써봤다면 아마 나를 찾아와 내 멱살을 잡았을 거요.그리고 그렇게 헛수고를 하게 만든 데 대한 앙갚음으로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겠지. 하지만 내 책을 읽지 않으니까 나를 편안한 사람, 호감가는 사람, 성공할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거요."
(···)
"따지고 보면 이 노벨 문학상이야말로 선생님의 논리에 대한 반박 아닙니까? 적어도 노벨상 심사위원단은 선생님의 작품을 읽지 않았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소.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내 작품을 읽었다 해도 내 논리는 여전히 정당하오. 읽으면서도 읽지 않는 식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니까. 꼭 인간개구리들처럼 물 한 방울 안 튀기고 책의 강을 건너는 거지."
"예, 지난번 인터뷰 때 그런 말씀을 하셨죠."
"그런 사람들을 개구리 독자들이라고 하는 거요. 독자들 대부분이 그렇지.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아주 뒤늦게 깨달았소. 내가 그렇게 순진하다오. 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책을 읽을 거라 생각했소. 나는 음식을 먹듯 책을 읽는다오. 무슨 뜻인고 하니, 내가 책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책이 나를 구성하는 것들 안으로 들어와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는 거지. (···)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루스트를 읽건 심농을 읽건 한결같은 상태로 책에서 빠져나오거든. 예전 상태에서 조금도 잃어버린 것 없이, 조금도 더한 것 없이. 그냥 읽은 거지. 그게 다요. 기껏해야 '무슨 내용인지' 아는 거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오. 지성인이라는 사람들한테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봤는지 아시오. '그 책이 당신을 변화시켰소?'라고 말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날 쳐다보는 거요. 꼭 이렇게 묻는 것 같았소. '왜 그 책 때문에 내가 변해야 하죠?'" (74-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