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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1 - 안드로메다 하이츠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의 이름을 중얼거려본다. 바나나 보트?
이름이 재미있다. 한 번 들어도 기억나는 이름이다.
일본 문학을 읽을 때, 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입에서 맴도는 이름들이다. 일본식 이름이 어색해서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곤 한다.
그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왕국>은 차분하게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즈쿠이시다. 역시 어려운 이름이지만 그녀의 이름을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 그냥 선인장을 떠올리면 된다. 차를 만드는 할머니와 함께 산에 살다가 홀로 도시에 살게 된 그녀의 이야기다. 사람보다 선인장과 더 친밀한 그녀의 직업은 가에데라는 점술인의 어시스턴트다.
앞이 안 보이는 가에데는 그 사람의 물건을 만지기만 해도 그의 모든 것을 아는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 시즈쿠이시는 선인장과 교류하며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후각으로 느끼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특별한 두 사람의 관계는 책 속에 표현을 빌리자면 [X파일]의 멀더와 스컬리랑 가장 비슷하다. 단순한 시청자 입장에서는 둘 만의 로맨스를 기대해보지만 역시 그들은 프로다.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는 연인보다 더 강력한 연대감이 느껴진다. 서로 다정하게 걱정하거나 위로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뭔가로 소통되는 느낌이다.
시즈쿠이시와 가에데의 만남은 <왕국>의 시작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은 일반인들과 전혀 다르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은 뭔가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지닌 신비한 능력은 사람들을 돕는다. 어쩌면 이런 마법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이가 바로 작가 본인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집중하게 되고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선인장과 교류하는 그녀와 물건에 담긴 기억을 볼 수 있는 그는 우리의 갇힌 마음을 열어 주는 사람들이다. 눈으로만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다.
피붙이의 애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그리고 나고 자란 땅의 에너지와 지금까지 부여 받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 내 주위에는 무지개처럼 겹겹이 애정의 고리가 있다. (17p)
시간이란 것도 정말 대단해. 마음대로 늘어나고 줄어들고, 자유자재야. 인간의 마음이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시도가 눈에 보이고, 퍼즐을 맞추듯 많은 것들을 알게 될 때, 나는 내가 세상에 살아 있다는 걸 느껴. 시즈쿠이시가 산속에서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처럼 말이야. (108p)
일상의 행복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뭔가 눈에 보이도록 확인하고 싶어하면 중요한 것은 놓치고 만다. 정말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처럼 말이다.
우리 삶이 매 순간 마음을 열고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살아 있음을 감사할 것이다. 그들처럼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신선한 공기를, 따스하게 비추는 햇살을,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 향기를, 사랑으로 두근대는 심장을……
선인장을 보면 외로운 사람 같다. 혼자 강인한 척하며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가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왠지 애처롭다. 뾰족하게 내민 가시가 누굴 위협하기보다는 제 살을 후비고 나온 것 같아서다. 외로움이 가시가 되어 총총히 박힌 선인장은 가끔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래, 꽃을 피워내는 모든 생명들은 사랑 받을 이유가 있지.
삶의 외로움과 고통을 알 것 같은 선인장은 그래서 아픈 사람들에게 좋은 약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요시모토 바나나와 선인장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