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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평점 :
자, 지금부터 눈을 감고 다음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백발의 노부인과 그녀의 손자가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텅 빈 초원 한가운데 앉아서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초원 속에 고립된 작은 강가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얼핏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고립된'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프랑스 유언>은 프랑스 소설입니다. 러시아 작가가 쓴 프랑스 소설.
저자 안드레이 마킨의 이력을 보면 이 소설이 매우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 소년이 프랑스사람인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 문학을 즐기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두 언어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느끼다가 사춘기 반항을 하면서 급기야 외할머니 샤를로트를 원망하는 상황까지,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막연히 샤를로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추억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은 샤를로트의 삶에서 소년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년은 외할머니가 겪었던 참혹한 인생 이야기에 그리 집중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주 엉뚱한 순간에 사춘기적 호기심이 환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만약 외할머니 샤를로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소년이 겪어야 할 혼란과 갈등이 없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어쩌면 소년은 샤를로트의 프랑스어가 주는 농밀하고 순수한 활기 덕분에 시베리아의 눈보라를 견딜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년은 몰랐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다음엔 사춘기 반항 때문에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애절한지를 미처 몰랐습니다. 소년의 엄마가 죽었을 때도 할머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덤덤했으니까.
저도 소년처럼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알아차렸습니다.
맨처음 소년이 앨범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이 가진 의미.
샤를로트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소포를 남깁니다. 클립으로 묶어 놓은 20여 장의 원고지.
그것은 세련되고 꼼꼼한 필체로 기록한 한 여인의 삶이었습니다. 스탈린 시대의 비극적인 운명들 중 하나였을 이야기. 성인이 된 소년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마지막 장에 클립으로 끼워진 작은 봉투에는 사진 한 장이 담겨 있습니다. 소년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
절묘한 반전 앞에 정신을 차려보니 샤를로트는 이미 말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프랑스 유언> 에서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아냐, 이 모든 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할머니가 눈을 들며 말했다.
"자, 오늘 아침에 너 주려고 보들레르가 쓴 짧은 시의 서로 다른 번역본을 두 부 복사했단다. 읽어줄테니 들어보렴. 재미있을 거야...."
...
그리하여, 샤를로트가 보들레르에 관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가 쓴 시의 첫번째 연을 들으니 그 여인의 존재가 어렴풋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게 그냥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두 눈 감았네, 어느 무더운 가을밤
그대 뜨거운 가슴 향기를 들이마시면
멋진 해안이 눈앞에 펼쳐지네
지루한 태양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
할머니는 번역문을 인용해야 되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가며 계속 말했다.
"... 너도 알다시피 보들레르 시에서 이 '무더운 가을밤'은 아주 특별한 순간이거든. 그래,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삶의 불행이 연이어지는 가운데 마치 한 줄기 빛처럼, 하나의 은총처럼 문득 이 무더운 저녁이 찾아온 거야. 이 두 가지 번역본은 보들레르의 시상을 잘못 표현해 놓은 것 같아. '어느 가을밤'이나 '어느 여름밤'은 너무 밋밋하고 영혼도 깃들어 있지 않아. 반면 보들레르의 시에서 이 순간은 마치 늦가을의 그 포근한 날들처럼 마법을 부리지...
하지만 번역의 진짜 패러독스가 존재하는 건 끝 부분, 마지막 행이란다. 브루소프 판이 보들레르를 넘어선거야! 그래, 보들레르는 '그대 뜨거운 가슴 향기'에서 태어난 그 섬의 '뱃노래'에 대해 말하고 있지. 그런데 브루소프는 그걸 번역하면서 '여러 언어로 소리치는 뱃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놀라운 건 러시아어로 단 하나의 형용사로 그걸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산문을 번역하는 사람은 작가의 노예이고, 시를 번역하는 사람은 작가의 라이벌이라고.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 문장을 끝맺을 시간조차 없었다. ... 갑작스런 호우가 우리를 우리 몸의 떨리는 경계선 안에 고립시켜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