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듣는 사람들
조던 태너힐 지음, 김산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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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한밤중에는 작은 소리도 굉장히 크게 느껴져요.

워낙 일상 소음에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못하다가 고요한 밤시간에 유독 소리에 민감해지는 것 같아요.

만약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계속 들린다면 어떨까요. 소음 공해, 아니 고문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소리는 보이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들린다는 소리가 나에겐 들리지 않는다면 상대가 청력이 뛰어나거나 혹은 환청을 듣는다고 생각하겠죠. 어느 쪽이든 서로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네요.

조던 태너힐 작가의 장편소설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주인공 클레어는 세쿼이아 크레센트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썼다면서 자신은 희생자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요. 문득 영화 <호프>에서 여자 경찰의 대사가 떠올랐네요. "아무리 괴물이라도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

이 소설에선 괴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강력한 '소리'가 존재하네요. 어느 날 갑자기 클레어는 아주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함께 있던 남편 폴에게 물었더니 그는 안 들린다고 했어요. 딸 애슐리도 듣지 못했고, 자신이 가르치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소리에 대해 말했다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네요. 아무도 못 듣는 소리를 혼자만 듣는 것도 황당하지만 한 번 시작된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일상 생활이 어려워졌네요. 특히 밤에는 소리 때문에 잠들 수 없었고 학교 수업도 집중하기가 힘들어진 거예요. 병원에 가도 딱히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괴로워하던 그녀에게 수업을 듣는 학생 카일이 다가와 자신도 똑같이 소리가 들린다면서,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걸 알려주네요.

도대체 소리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특정 사람들에게만 들리는지, 그것이 궁금했는데 점차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면서 클레어의 삶이 흔들리는 과정을 보여주네요. 단지 소리 때문에 이런 혼란과 비극이 벌어진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네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이 얼마나 쉽게 음모를 만들어내는가를 확인한 것 같아요.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솔직히 그 점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네요.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허점이 아닐까 싶어요. 진실은 늘 멀리, 아득한 곳에 있다는 것. 미스터리한 소음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네요. 클레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바로... 당신은 어떤가요.

"··· 여러분이 완전한 진실을 알고 싶다면, 그런 밈 속의 짧은 문구보다는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아직도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떻게 그렇게 작고 무해한 무언가가 내 삶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었냐는 것이다.

어떻게 그 모든 자기 성찰과 초월과 파괴가 거의 감지할 수도 없는 낮은 소리에서 시작될 수 있었는지."

(12p)

"··· 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의견만 있을 뿐이지.

그는 진실이 존재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과학과 법률에 의해 증명된 객관적 사실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최근 발명된 거라고. 우리가 천 년 동안 알고 있었던 것은 예감과 충동과 의견이 전부였어요, 그가 말했다. 그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이러한 음모론적 사고는 여러 번의 모임 가운데 단 몇 차례만 고개를 내밀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2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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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예술 - 스케치로 내 삶에 예술을 들이는 법
니샨트 자인 지음, 김가원 옮김 / 책장속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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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지금은 아니고, 꽤 오래 전에 누군가의 얼굴을 정성껏 그렸던 적이 있네요.

원래 선물하려고 그린 건데 그냥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간직하고 말았네요. 이 책을 보다가 문득 그때의 마음이 떠오르면서 무척 설렜네요.

《은밀한 예술》은 니샨트 자인의 그림 에세이네요.

저자는 자신을 '은밀한 예술가'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공과대학에 들어가 생체역학으로 석사과정을 이어갔고, 신경과학 박사 과정 연구원으로 살던 저자의 삶이 하루아침에 달라졌네요. 그동안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본래 꿈꾸던 작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은 거예요. 글을 구상하려고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장소와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은밀한 예술의 여정이 된 거죠. 정말 신기하네요. 꿈과 운명 그리고 예술... 빙 둘러서 오느라 조금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았으니 말이에요. 이 책 속 그림들은 은밀한 예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요근래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미술 작법에 관한 책들을 들춰보게 되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법보다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걸, 이 책을 보면서 깨닫게 됐네요.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 치유가 되었다는 얘길 종종 들었지만 직접 체험해 본 적이 없으니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었네요. 마음대로 그린다는 것이 제게는 뭔가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린다는 자체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나봐요. 남의 시선 때문에 정작 나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었던 거죠.

저자는 작은 스케치북 하나와 연필 한 자루로 내 삶에 예술을 들이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 예술이 제겐 '자유로움'으로 느껴졌어요. 가장 나답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자유! 스케치북 위에 그려진 그림들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네요. 꾸준히 그리면 그릴수록 그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더 커진다고 하네요. 무엇보다도 '은밀하게' 은밀한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5분 스케치로 은밀한 나만의 시간을 가져봐야겠네요.



"'은밀한 예술'은 '예술가'인 내가 '은밀하게'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그때는 항상 남의 시선을 의식했고,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움을 짊어진 채 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몰래 하는 예술'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됐다. 가장 평범한 날, 가장 평범한 장소에도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늘 존재했다. ··· 예술 자체도 은밀한 것이었다! 그렇게 '은밀한 예술'의 두 번째 의미를 발견했다. 은밀한 예술이란 세상에 늘 존재하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누군가 발견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한 건 오직 잠깐의 시간과 그리려는 마음, 그리고 주의 깊게 바라보는 눈뿐이지만 그 대가로 얻게 되는 것은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이다. 은밀한 예술의 진짜 대단한 점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재미있게 느낄 수 있고, 어떤 장소든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세상 탐험 중'이다. 별것 아닌 듯한 이 작은 습관이 내게 건네는 보상은 언제나 기대 이상이다."

(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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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신재민 지음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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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네요.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원인이 되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이어지네요.

한국 오컬트 호러 장르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네요. 단순한 괴기스러움이나 오락적인 공포와는 다르다는 것.

《생가》는 신재민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네요.

저자의 이력을 보니 본인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로 각본을 쓰고 연출하는 영화 감독이었네요.

"1994년 태어난 비디오키즈로,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를 만들다가 어느새 소설까지 마수를 뻗친 생태계 교란종.

2020년 에이스토리 신진작가 데뷔 프로그램에 당선돼 글쓰기를 시작했고, 2021년 CJ ENM 오펜 스토리텔러 입상 등의 경력을 쌓아

영화 《커미션》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생가』로 '제13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어쩐지 첫 장면부터 영화 스크린을 보는 듯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 연출이 눈길을 사로잡네요. 압도적인 분위기로 등장하는 인물, 이운암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었다가 빠지면서 소설의 중심이 되는 장소를 넓은 시야로 보여주고 있네요. 연기와 불꽃이 치솟으며 터져 나가고, 다음 장면에서는 훨씬 더 강렬하고 충격적인 현장을 묘사하고 있네요.

소설은 가상의 인물인 이운암과 생가의 비밀을 다루고 있네요. 이운암은 과거 독재를 일삼았던 전직 대통령으로 현재까지도 잘 살고 있는 인물인데 그의 생가가 화재로 불타자마자 생가를 지었던 도편수(목수 중 최고 우두머리) 지범근이 양아들에게 '생가를 절대 복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기묘한 죽음을 맞는데요. 이운암의 손자 건승이 불에 탄 생가를 복원하기 위해 목수를 만나지만 지범근의 유언 때문에 아무도 나서질 않게 되면서, 독일에 살고 있는 지범근의 아들 재헌까지 찾아가게 되고, 재헌은 오히려 아버지의 유언을 듣더니 금지된 복원을 강행하면서 긴장감은 고조되네요.

"그 집 짓지 마. 다시 지어선 안 돼." (14p)

도대체 왜, 무엇때문에 복원을 막은 것일까요. 생가 복원을 둘러싼 기묘한 비밀과 공포를 다룬 한국 오컬트 호러 미스터리 작품이네요. 가상의 이야기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인물의 특징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썩은 권력의 추악한 면들을 떠올리게 되네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 심연을 닮아가는 인물을 보면서 대물림되는 유산과 역사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금기를 깨뜨린 뒤에 드러나는 잔혹한 진실, 결국 악인악과, 대가를 치르는 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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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리커버 에디션)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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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투덜거려도 밉지 않은 사람이 있네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솔직함과 유머를 겸비할 때 느껴지는 매력이랄까요. 특히나 애정을 품고 있는 상대라면 뭘 해도 다 이해할 수 있잖아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여행기 시리즈 중 영국 여행을 다룬 책이네요. 리커버 에디션이라는 점, 원래 1995년에 출간된 책이라서 현재 상황과는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미국인 작가 빌 브라이슨의 시선으로 바라본 진짜 영국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네요. 이 책은 영국 여행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한때 삶의 터전이었던 영국을 회고하는 의미의 기록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저자는 영국에서 거의 20년간 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돌아보고 싶어서 이 여행을 시작했고, 그동안 보금자리였던 '친절한 녹색 섬'에 대한 고별 여행이라고 밝히고 있네요.

"영국인들은 유럽을 디즈니월드나 마찬가지로 본다. 만약 당신이 영국의 언론매체에서 보여주는 내용으로 세계지리에 대한 개념을 익혔다면, 미국은 영국 근처 어딘가에 있는 곳이 되고 프랑스와 독일은 포르투갈 서쪽에 위치한 아조레스 제도 어디쯤에 붙어 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또 호주는 중동의 어느 뜨거운 나라쯤 될 테고, 그밖에 다른 나라들은 (이를테면 부룬디, 엘살바도르, 몽골, 부탄 같은) 신화 속에 존재하거나 아예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야 갈 수 있는 곳이 된다. ··· 이탈리아에 정치적 위기가 닥치거나 독일 카를루스 지역으로 핵폭탄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마 영국 언론들은 지면의 한 귀퉁이만을 할애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시골 촌구석의 어떤 여자가 화가 나서 남편의 거시기를 잘라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하면 그날 당장 아홉 시 뉴스에서 머리기사 다음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 이 모든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이유는 어느 화창한 가을날 오후에 마흔네 살이나 된 내가 칼레의 어는 더러운 해변에 서서 영국해협 건너편 지평선에 있는 노두를 바라보며 느낀 경이로운 느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16-17p)

스물을 넘긴 풋풋한 청년 시절에 저자는 안개 낀 밤의 영국을 처음 마주했다고 해요. 칼레에서 출발한 야간 페리 호를 타고 막 도버에 도착했고, 집에서 그렇게 멀리 떠나온 건 처음인 데다가 진정한 의미에서 외로움을 경험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묘하게 들떠 있었다고 해요. 경이로움과 혼란스러움, 전율이 마구 뒤섞은 감정이 불안하면서도 무척 강렬했기에 여전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죠. 안개가 걷힌 밤하늘은 고요하고 청명했고 별빛이 빛났으며, 저 멀리 방파제 끝에 있는 등대 불빛이 끊임없이 바닷물 위를 스쳐가는, 참으로 매혹적인 풍광이었지만 현실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대요. 배낭을 뒤져서 다 끄집어내 입었는데 모직양말은 장갑으로 삼았고 플란텔로 만든 사각팬티는 머리에 뒤집어썼으니 행색이 기괴해보였을 거예요. 근처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노인과 마주쳤는데 몸을 녹일 수 있는 식당을 알려주면서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에 쓴 팬티를 벗는 게 좋을 거라고 했대요. 그 다음에 노인은 "분명 오늘 날씨는 맑아질 거야." (24p)라고 말하며 지나갔는데 그 뒤에 바로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엄청 낭만적이었다가 불쌍했다가 웃음이 났다가 실소가 터지는 완전 시트콤 같은 장면이었네요.

"영국식당은 하나의 원칙이 있다. 두크셀이니 뭐니 시간을 끌고 누와제뜨니 뭐니 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건 얼마든지 봐주지만, 푸딩에 대해서만은 절대 간섭하게 놔두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 말이 절대적으로 맞다. 디저트 목록에 올라간 음식들은 모두 끈적거리고 달달한 음식에 걸맞은 적당한 영어이름이 붙어있다. 나는 끈적거리는 토피 푸딩을 먹었는데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171p)

"기차 안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승객들은 잔뜩 성난 상태였다. 나는 내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방해해야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쩨쩨하게 내 자리를 되돌려준 그 일행은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원수를 대해도 그보다는 상냥하게 쳐다볼 것 같았다. 참 운수도 좋은 날이다! ··· 하지만 영국 국철은 운이 없는 날인 모양이었다. 역에서 벗어나 1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슬금슬금 기어가더니만 갑자기 이유도 없이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마침내 안내방송의 목소리가 먼저 가던 철도에서 문제가 생겨 타고 있는 기차가 스톡포트에서 멈출 거라 말해주었다. ··· 여행객들이 물어보는 행선지를 안내하도록 고용한 영국 국철 직원에게 문의하려고 줄을 섰다. 영국의 기차역 중에 '꺼져'라는 이름의 역이 없는 게 그 직원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울 것 같았다."

(383-384p)

"창구 앞에는 모두 사람이 일을 보고 있었다. 만약 이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상황이라면 다음으로 이어질 장면은 둘 중 하나다. 사람들이 창구로 마구 몰려들어 동시다발적으로 자신의 일을 봐달라고 외쳐대거나 아니면 각 창구 앞에 줄을 서서 다들 자기 줄이 다른 편 줄보다 더 빨리 짧아질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보다 현명하고 영리한 배열 방법을 생각해낸다. 두 개의 창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줄로 늘어서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창구가 비면 맨 처음에 선 사람이 가서 일을 본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 빈 공간을 메운다. 대단히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식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누구도 명령을 내리거나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말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냥 알아서들 하고 있다."

(450-451p)

저자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표현력에 감탄했네요. '거시기 부인'과의 추억으로 시작해 런던의 구석구석, 아름다운 풍경이나 멋진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일상적인 모습들, 이를 테면 맛없는 음식이나 불친절한 숙소, 이상한 지명이나 기차 시간표 등등을 소개하면서 오르락내리락 감정의 변화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네요. 얼핏 투덜거리는 말투는 그것이 싫다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애정이었구나 싶더라고요. 어쩐지 고별 여행이라니, 떠나기 아쉬울 정도로 정이 들었던 거죠. 좋든 나쁘든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노라는 마지막 고백이 하이라이트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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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력을 키우는 수학의 힘 - 원리를 꿰뚫고 직관으로 끝내는 수학의 모든 것
장허 지음, 김지혜 옮김, 신재호 감수 / 미디어숲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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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모르면 그냥 외워!"

이해가 잘 되지 않아도 무작정 암기하며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네요.

수학도 마찬가지, 공식을 외우고 문제 유형을 반복해서 풀다 보면 어느새 문제와 답이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가서 '안다고' 착각했더랬죠.

그러니 수학이 생각하는 학문이라는 본질을 무시하는 공부를 했던 거죠. 중국도 우리처럼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이라서 수학 공부에 대한 고민도 비슷한 것 같아요. 베이징시 하이뎬구 수학교사인 장허 선생님도 오랜 시간 학생들과 학부모를 만나면서 쓸모도 없는 수학을 왜 배워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수학 공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네요.

"중고등학교 수학 공부의 가장 큰 가치는 논리력을 키우는 데에 있다.

수학 지식은 수학 학습의 매개체로서 우리는 수학 지식으로 학습을 하고 사고력을 기르고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까지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수학적 사고를 이용하여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 어떻게 해야 수학을 잘 할 수 있을까? 우선 명확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명확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뇌를 움직인다는 의미로 '사고'를 뜻한다. 분명하게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 이해한 수학 문제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수학적인 사고를 훈련시키는 좋은 방법이 된다.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

(9p)

《사고력을 키우는 수학의 힘》은 수학의 본질과 원리를 익히고자 하는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수학적 사고력을 기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네요. 이 책에서는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어요. 칠판에 " x 2-x "가 적혀 있다면 단순히 기호를 읽고, x 에 숫자를 대입하는 것만으로는 수학적인 사고활동이라 할 수 없어요. 기호 x 는 수학에서 정해지지 않은 값으로 변수 또는 미지수, 함수이며, x 를 수직선 위의 좌표로 이해하면 이것은 움직이는 점을 나타낼 수 있어요. x 축 위의 두 점으로 본다면 x 와 2-x 의 합은 2로 볼 수 있고 이것은 대수적 관점이네요. x 와 2-x 를 함수로 보면 서로 수직인 두 함수의 그래프로 나타내며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함수의 개념과 성질을 공부할 때 실제 배경이 되는 그래프를 이해하는 것이 수학의 눈으로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기하학적 특징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사고의 힘이자 역량이 되는 거예요. 함수와 그래프, 도형과 식을 따로 보지 않고 두 관점을 연결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흥미롭네요. 수학 문제를 풀 때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즉 대수적 사고와 기하적 사고 중에서 어떤 생각채널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한데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면서 생각하는 방식으로 문제해결능력을 키울 수 있네요. 어떤 문제든 해당 문제에서 풀어야 하는 핵심을 간파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그걸 알면 주어진 대상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어서 푸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거예요. 저자의 말처럼 수학을 공부하며 함수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고가 일어나면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이해하면서 더 높은 수준의 광범위한 사고와 관점에 이를 수 있네요. 단순 공식 암기나 기계적인 문제 풀이, 타인의 풀이를 무작정 따라하는 공부에서 벗어나 왜 그런 답이 나오는지 추론하는 힘을 갖추면 난해한 문제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결국 수학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깨우고 키우는 힘을 얻을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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