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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리커버 에디션)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투덜거려도 밉지 않은 사람이 있네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솔직함과 유머를 겸비할 때 느껴지는 매력이랄까요. 특히나 애정을 품고 있는 상대라면 뭘 해도 다 이해할 수 있잖아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여행기 시리즈 중 영국 여행을 다룬 책이네요. 리커버 에디션이라는 점, 원래 1995년에 출간된 책이라서 현재 상황과는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미국인 작가 빌 브라이슨의 시선으로 바라본 진짜 영국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네요. 이 책은 영국 여행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한때 삶의 터전이었던 영국을 회고하는 의미의 기록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저자는 영국에서 거의 20년간 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돌아보고 싶어서 이 여행을 시작했고, 그동안 보금자리였던 '친절한 녹색 섬'에 대한 고별 여행이라고 밝히고 있네요.
"영국인들은 유럽을 디즈니월드나 마찬가지로 본다. 만약 당신이 영국의 언론매체에서 보여주는 내용으로 세계지리에 대한 개념을 익혔다면, 미국은 영국 근처 어딘가에 있는 곳이 되고 프랑스와 독일은 포르투갈 서쪽에 위치한 아조레스 제도 어디쯤에 붙어 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또 호주는 중동의 어느 뜨거운 나라쯤 될 테고, 그밖에 다른 나라들은 (이를테면 부룬디, 엘살바도르, 몽골, 부탄 같은) 신화 속에 존재하거나 아예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야 갈 수 있는 곳이 된다. ··· 이탈리아에 정치적 위기가 닥치거나 독일 카를루스 지역으로 핵폭탄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마 영국 언론들은 지면의 한 귀퉁이만을 할애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시골 촌구석의 어떤 여자가 화가 나서 남편의 거시기를 잘라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하면 그날 당장 아홉 시 뉴스에서 머리기사 다음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 이 모든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이유는 어느 화창한 가을날 오후에 마흔네 살이나 된 내가 칼레의 어는 더러운 해변에 서서 영국해협 건너편 지평선에 있는 노두를 바라보며 느낀 경이로운 느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16-17p)
스물을 넘긴 풋풋한 청년 시절에 저자는 안개 낀 밤의 영국을 처음 마주했다고 해요. 칼레에서 출발한 야간 페리 호를 타고 막 도버에 도착했고, 집에서 그렇게 멀리 떠나온 건 처음인 데다가 진정한 의미에서 외로움을 경험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묘하게 들떠 있었다고 해요. 경이로움과 혼란스러움, 전율이 마구 뒤섞은 감정이 불안하면서도 무척 강렬했기에 여전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죠. 안개가 걷힌 밤하늘은 고요하고 청명했고 별빛이 빛났으며, 저 멀리 방파제 끝에 있는 등대 불빛이 끊임없이 바닷물 위를 스쳐가는, 참으로 매혹적인 풍광이었지만 현실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대요. 배낭을 뒤져서 다 끄집어내 입었는데 모직양말은 장갑으로 삼았고 플란텔로 만든 사각팬티는 머리에 뒤집어썼으니 행색이 기괴해보였을 거예요. 근처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노인과 마주쳤는데 몸을 녹일 수 있는 식당을 알려주면서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에 쓴 팬티를 벗는 게 좋을 거라고 했대요. 그 다음에 노인은 "분명 오늘 날씨는 맑아질 거야." (24p)라고 말하며 지나갔는데 그 뒤에 바로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엄청 낭만적이었다가 불쌍했다가 웃음이 났다가 실소가 터지는 완전 시트콤 같은 장면이었네요.
"영국식당은 하나의 원칙이 있다. 두크셀이니 뭐니 시간을 끌고 누와제뜨니 뭐니 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건 얼마든지 봐주지만, 푸딩에 대해서만은 절대 간섭하게 놔두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 말이 절대적으로 맞다. 디저트 목록에 올라간 음식들은 모두 끈적거리고 달달한 음식에 걸맞은 적당한 영어이름이 붙어있다. 나는 끈적거리는 토피 푸딩을 먹었는데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171p)
"기차 안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승객들은 잔뜩 성난 상태였다. 나는 내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방해해야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쩨쩨하게 내 자리를 되돌려준 그 일행은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원수를 대해도 그보다는 상냥하게 쳐다볼 것 같았다. 참 운수도 좋은 날이다! ··· 하지만 영국 국철은 운이 없는 날인 모양이었다. 역에서 벗어나 1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슬금슬금 기어가더니만 갑자기 이유도 없이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마침내 안내방송의 목소리가 먼저 가던 철도에서 문제가 생겨 타고 있는 기차가 스톡포트에서 멈출 거라 말해주었다. ··· 여행객들이 물어보는 행선지를 안내하도록 고용한 영국 국철 직원에게 문의하려고 줄을 섰다. 영국의 기차역 중에 '꺼져'라는 이름의 역이 없는 게 그 직원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울 것 같았다."
(383-384p)
"창구 앞에는 모두 사람이 일을 보고 있었다. 만약 이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상황이라면 다음으로 이어질 장면은 둘 중 하나다. 사람들이 창구로 마구 몰려들어 동시다발적으로 자신의 일을 봐달라고 외쳐대거나 아니면 각 창구 앞에 줄을 서서 다들 자기 줄이 다른 편 줄보다 더 빨리 짧아질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보다 현명하고 영리한 배열 방법을 생각해낸다. 두 개의 창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줄로 늘어서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창구가 비면 맨 처음에 선 사람이 가서 일을 본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 빈 공간을 메운다. 대단히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식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누구도 명령을 내리거나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말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냥 알아서들 하고 있다."
(450-451p)
저자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표현력에 감탄했네요. '거시기 부인'과의 추억으로 시작해 런던의 구석구석, 아름다운 풍경이나 멋진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일상적인 모습들, 이를 테면 맛없는 음식이나 불친절한 숙소, 이상한 지명이나 기차 시간표 등등을 소개하면서 오르락내리락 감정의 변화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네요. 얼핏 투덜거리는 말투는 그것이 싫다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애정이었구나 싶더라고요. 어쩐지 고별 여행이라니, 떠나기 아쉬울 정도로 정이 들었던 거죠. 좋든 나쁘든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노라는 마지막 고백이 하이라이트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