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라푼첼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라푼첼의 동화를 떠올리며 지레짐작으로 어떤 러브스토리를 기대했었다. 책표지의 잠자는 라푼첼의 긴 머리카락과 검은 고양이를 보면서도 머리에 얽혀있는 가시덤불과 아파트는 보지 못했다. 조금만 유심히 그림을 봤더라도 핑크빛 추측을 하진 않았을텐데.

첫 장을 열자, 아파트 8층에 사는 결혼 6년차 주부의 너무나 단조롭고 나른한 일상이 펼쳐진다. 처음부터 이건 환상적인 동화는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며 현실이다. 정말 특별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데즈카 시오미의 일상이 너무나 라푼첼과 흡사하다. 다만 동화처럼 해피엔딩이 아닐 뿐.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가 한편으로 지루하면서도 자꾸 뭔가를 기대하며 보게 만들었다. 일본에 사는 평범한 주부의 일상도 우리 나라 주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표출하는 감정과 행동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좀 당황스러운 설정이었다. 옆집 소년 로미 시오미는 루피오라고 부른다. 28살인 시오미가 갖는 루피오에 대한 감정이 진정한 사랑일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중학교 1학년인 루피오는 12살이고 시오미는 28살이니 열 여섯 살의 나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생일이 지나 13살이 되니 둘의 나이 차이는 열 다섯 살이다. 굳이 루피오의 생일을 들먹이며 나이 차이가 한 살 줄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루피오에 대한 특별한 감정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믿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혀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나이에 연연하며 애써 부인하다가 문득 루피오의 양아버지 대니는 마흔 세살이고 자신과 열 다섯 살 차이라는 걸 떠올린다. 연상의 남자와는 괜찮고 연하의 남자는 안된단 말인가.

그렇지만 왜 그들 중에서 택해야 하는건지,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남편이 있지 않나?

시오미의 일상과 그 주변 인물들의 관계는 갑갑한 느낌을 준다. 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아직 젊은 그녀가 시들거리며 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게으름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전부인지도 알 수 없다.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결혼하던 때의 감정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귀찮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에도 게으르다. 그렇게 게으름을 만끽하던 그녀가 옆집 소년 루피오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웃과도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정도만 친분을 유지했던 그녀다.

그녀는 처음에는 한가로운 자기만의 세상을 즐겼다. 그러다가 남편이 가져온 고양이 다비가 그녀의 성에 들어온다. 그리고 옆집 소년 루피오와 옆집 남자 대니. 이웃집 야나기다 씨.

이들은 한결같이 외로운 존재다. 라푼첼처럼.

그녀는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던 자신의 무기력한 외로움을 발견했다. 그리고 사랑을 갈구했다. 누군가 안아주고 사랑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대상이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 역시 그녀에게서 사랑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이들 부부의 관계는 그녀의 게으름처럼 어쩔 수 없는 습관이었을까.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을 수도 없는 사람들. 그들은 결혼했지만 사랑을 몰랐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동화 속 라푼첼은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나중에 행복한 결말을 맺지만 만약 라푼첼이 진정한 사랑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태어나자마자 무시무시한 마녀의 손에서 자란 라푼첼이 제대로 사랑을 받았을지도 의문이다. 열 두 살이 되자 높은 탑에 갇힌 라푼첼은 너무나 외로웠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길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자신을 가둔 마녀에게서 벗어날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왕자를 만난 것이다. 왕자는 라푼첼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고 라푼첼은 그녀를 구원해준 왕자가 고마웠다. 이들은 사랑한 것이 아니다.

왕자는 분명 라푼첼의 미모에 반한 것이지 그녀 자체를 사랑하지 못했을 것 같다. 왕자와 라푼첼이 사랑하기에는 서로의 세계가 너무나 달랐으니까. 탑에만 갇혀 있던 라푼첼은 누군가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람과 어울려 사는 방법도 몰랐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왕자와 결혼했지만 자기만의 탑에 갇혀 살기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늘 탑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갇혀 있는 것이 너무 익숙해진 라푼첼.

동화 속의 라푼첼과 현실 속의 시오미.

서로가 닮았지만 다르다.

현실은 동화처럼 억지스런 해피엔딩이 아니래도 좋다. 우리 삶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살아있기만 하면 희망은 현실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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