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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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렸어요.

왕비로 산다는 것.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존재, 왕비.

왕비는 조선시대에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지만 권력과 부를 누리는 지위라기보다는 제약이 더 많았다고 해요.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왕비라는 위치는 풍전등화와 같은 존재였던 거죠.

저자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왕비라는 존재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어요. 

저자 왈, "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건 극한 직업!"이라고.


조선왕조계보를 보면 스물일곱 명의 왕이 재위했고, 왕비는 폐비까지 포함하면 마흔일곱 명이에요.

왕비의 숫자가 왕보다 더 많은 건 왕이 두 명 이상의 왕비를 맞았기 때문이에요. 

왕비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남편이 세자인 시절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세자가 왕이 되면 따라서 왕비가 되는 것이었어요. 

대개 10세를 전후한 나이에 세자빈으로 들어와 삼간택의 과정을 거쳤어요. 그런데 이 정통 코스를 거쳐 왕비가 된 인물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박씨,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 김씨,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 어씨 등 6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변수들 때문에 세자빈의 지위를 잃거나, 왕비가 된 후에도 정변으로 폐위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이 책에서는 마흔세 명의 왕비들을 만날 수 있어요.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왕비들의 삶이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요.

7일간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는 실제로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7일의 왕비>의 역사적 인물이었다고 해요.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1506년 9월 2일에 일어난 중종반정이었어요. 반정 주체 세력이 연산군을 대신할 왕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지목하고 진성대군의 집을 찾았고, 진성대군은 자신이 정치적 희생물이 될 것을 염려하여 나서지 못했어요. 이때 지혜를 발휘한 것이 단경왕후였어요. 침착하게 주시하고 판단하여 위기의 상황에서 남편인 진성대군을 구했어요. 그러나 단경왕후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건 왕비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라는 최측근 세력이었기 때문이에요. 반정 세력들이 단경왕후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그녀를 왕비로 두면 보복당할 것을 우려하여 폐위를 청했고, 중종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본가가 있는 인왕산 아래 사직골로 거처에 머물렀는데, 중종은 경복궁에서 늘 옛 왕비를 그러워했다고 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단경왕후는 중종이 알아볼 수 있도록 집 근처 인왕산 자락에 붉은 치마를 걸쳐놓았고,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오는 인왕산 치마바위 이야기예요.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재위 기간에 있었던 왕은 윤달을 포함하여 9개월간 왕의 자리에 있었던 인종이에요. 6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 되어 25년을 세자로 있었으나 정작 왕으로 재위한 기간이 워낙 짧았어요. 그러니 인성왕후 박씨 또한 가장 짧게 재위한 왕비였어요. 중종이 오랜 기간 재위한 데다가 중종의 계비로 들어온 문정왕후 윤씨가 대왕대비의 지위에 있으면서 아들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으니, 인성왕후의 역할은 미미했어요. 실제로 <명종실록>에서 인성왕후는 왕실 어른으로 기본적인 대접을 받는 것 이외에 그녀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고 해요. 

허울 좋은 왕비의 삶, 그 속내를 들여다보니 시대적 굴레와 압박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요.

조선의 역사를 왕비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역사 수업이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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