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아물지 않는다 -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이산하 지음 / 마음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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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도 있지만, 스스로 애써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더군요.

<생은 아물지 않는다>는 이산하 시인의 에세이예요.

시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은 시인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새삼 시인은 세상의 아픔을 대신 아파해주는 사람이구나,라고 느꼈어요.

어쩌면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도 착각일지도 모르겠네요. 겨우 책을 통해 아는 것을 진짜 안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주를 아름다운 여행지로만 알고 있지만 그 제주에는 피비린내나는 슬프고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어요.

저 역시 4·3 항쟁을 역사적 사실로는 알고 있지만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시인은 시가 아닌 에세이를 통해서 이 사회의 현실과 개개인의 상처뿐 아니라 역사적 아픔까지 이야기하고 있어요.

삶이 아픔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물지 않을 아픔에 대해서.

그러나 무겁고 침울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잔잔하게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몸이 아프면 약을 먹을 텐데, 마음이 아픈 건 약이 없는 것 같아요.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처 입은 마음이 들여다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상처 입는 건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상처들이 생기곤 하잖아요. 어쩌면 그런 경험들이 스스로를 더 위축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옳은 것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아프지 않으려고 피하는, 중심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 그래서 나이는 들었지만 어른이 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여전히 아둥바둥, 그러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걸 느꼈네요. 시인은 그저 이야기를 들려줄 뿐인데, 괜시리 뭔가 가슴을 콕콕 찔러대네요. 어떤 삶을 살았던가...

시인이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를 통해 그 생각을 전해주는 것 같았어요. 나즈막한 읊조림이 가슴 깊숙히 들어오네요.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289p)



"4·3 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도 있었습니다.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

    - '제주 4·3 70주년' 문재인 대통령 추념사 중에서   (176p)


'이산하 시인'이라는 말은 내가 1987년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이후부터 석방되고 나서까지 '극좌파 시인' '빨치산 시인' '빨갱이 시인'으로 낙인찍혀

4·3 만큼이나 좌우 모두 기피하던 금기의 이름이 되었다. 몸은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세상 속 내 이름은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창살 없는 감옥이자 마음의 감옥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 그 세월이 30년이었다. 

... 4·3 항쟁 70주년을 맞아 《한라산》 개정판을 냈다. 시집 후기에도 썼듯이 '내 젊은 날의 비명이자 통곡'이었던 시를 30년 뒤에 하나씩 천천히 쓰다듬으며 다듬었는데

그 과정이 마치 유골 발굴 현장에서 흩어진 뼈를 주워 하나씩 맞춰가는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 비록 유배는 풀렸지만 늘 진실만 말해야 한다는 멍에가 여전히 내 목에 걸려 있는 한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그 베인 자리가 아물면 내가 다시 벨 것이다. 그러니 내 생은 결코 아물지 않는다. 아물면 죽음이다.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 이산하 , <서시> , 《한라산》, 노마드북스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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