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도시소설가, 농부과학자를 만나다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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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고갯마루에서 우리는 만났고,

서로를 알아봤고,

걸어왔던 길과 걸어가고 있는 길과 걸어가고자 하는 길을

이야기했다."   (23-24p)


살다보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발견하곤 해요.

그 경계는 좋거나 나쁜 무엇이 아니라 너와 나를 구분짓는, '다름'의 발견인 것 같아요.

이 책은 저한테 그 '다름'이 보여주는 새로운 '길'이에요.


저자는 도시소설가로서 사방이 콘크리트인 작업실을 벗어나 문장 밖을 쏘다니고 싶었고, 수많은 농촌 마을을 돌아다녔다고 해요.

가장 많이 간 마을이 전라남도 곡성군이었고, 그곳에서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된 거예요.

농부과학자 이동현님.

곡성군에 있는 농업회사법인 미실란(美實蘭) 대표이자 미생물 박사라고 해요.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농부라고 해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이 서로의 곁에 머물면서 달라지는 과정이 이 책속에 담겨 있어요.

저자는 그 시간들을, '두 번째로 내 삶을 깨우는 시간'이자, '우리가 함께한 발아의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새롭고 낯선 만남이 특별한 인연이 되어, 서로를 흔들어 깨우면서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져요.


"아름답지요?"

곡성에 갈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들었다고 해요. 아름답지 않느냐고 묻던 그곳은, 저자에겐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장소였대요.

그래서 침묵한 것인데, 이 대표는 오히려 강한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웃고 넘어갔다고.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해봤어요. '오늘 나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꼈지?' 

우리가 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매혹되었기 때문이에요. 강렬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관계 속에 아름다움이 있어요.


땅에 매혹된 소설가와 이야기에 매혹된 과학자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어느 순간 그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두 사람의 낯선 삶이 나를 흔들어 깨우네요. 경험해본 적 없는 그들의 삶이 나에게 영향을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어요. 

초록빛 물결을 이루는 논두렁 사진을 바라보며, 사람과 동식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진짜 세상이 보였어요.


씨나락은 내년 농사에 사용할 볍씨고, 오가리는 장독의 사투리래요. 옛날부터 한반도엔 터주 즉 집터를 지키는 지신(地神)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는데, 전라도에선 철륭, 경상도에선 텃고사, 충청 이북엔 터주라고 불렀대요. 전라도에선 집 뒤 장독대에 대부분 철륭을 모셨는데, 청단마을에서 철륭을 오가리에 모신다는 풍습 자료를 읽고 두 사람이 직접 찾아갔대요. 아흔여섯 살 김씨 할머니에게 철륭 오가리 이야기를 꺼냈더니, 툇마루로 데려갔대요. 나무판 세 장을 걷어낼 때까지 할머니는 뒷짐을 진 채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시더래요. 오가리는 거기 그대로 있었대요. 할머니는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이 험한 골짜기 마을로 시집와서 아흔여섯 살까지, 긴 세월을 농사짓고 가족을 챙기며 보냈대요. 

"고맙구만, 고마와." 

"저희가 고맙죠. 오가리를 마루나 방 밑에 묻어두고 썼단 얘길 듣기만 했지 직접 본 건 처음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시상 뜨기 전에 저것을 다시 몬챠볼 줄은 참말로 몰랐네. 영판 고마와."  (147-148p)

...

곡성은 대대손손 벼농사를 짓고, 쌀을 신앙의 대상으로 떠받든 곳이었다. 

미실란과 곡성은 '쌀'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너무나도 어울리는 조합인 것이다.

이것은 정녕 우연일까. 오가리에 깃든 철륭이 미실란을 곡성으로 끌어당긴 것은 아닐까.

툇마루 밑에 오가리를 숨긴 까닭이 가족 먹을 곡물을 감추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오가리는 김 할머니 가족이 가장 소중한 것을 두는 비밀 금고이기도 했다.

다른 것은 다 빼앗긴대도 결코 내어줄 수 없는 물건을 거기에 뒀다. 툇마루 밑 오가리에 모신 씨나락을 떠올려보라. 

거기에 철륭이 깃드는 것은 농부에게 씨나락이 곧 목숨이기 때문이다. (149p)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았는가.

얼마나 자주 소중함을 되새기며 새로운 다짐을 보태는가.

저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어요. 

세상 풍파가 거셀수록 내 삶의 중심으로 돌아와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내 마음의 오가리를 열고 씨나락을 품으라고 이야기하네요.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라고요.


지금 우리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그것을 지겨내는 의지가 필요해요. 큰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굳건한 뿌리를 내려야 해요.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농부의 일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네요. 매혹적인 이야기꾼 덕분에.


발아 = "한껏 솟아오르고 또 한껏 뻗어내려"

모내기 = "세상의 모든 마음을 주고받다"

김매기 = "지키고 싶다면 반복해야 한다"

추수 = "여기까지 왔고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파종 = "사람이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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