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희순 - 노래로, 총으로 싸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정용연.권숯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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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 있어요.

바로 독립운동가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이 책 덕분에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윤희순 의사를 알게 되었어요.


<의병장 희순>은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에요.

윤희순 의사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남긴 《일생록》일부 사진이 책 속에 실려 있어요.

표지에는 '고흥 유씨 항재 처 해평 윤씨 가정록 (高興 柳氏 恒齋 妻 尹氏 家庭錄)' 이라고 적혀 있어요. 줄여서 '일생록'이라고 해요.

말년에 윤희순이 자신과 시댁인 고흥 유씨 일가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한글 문서이며, '항재'는 윤희순의 남편 유제원의 호라고 하네요.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일생록》을 다시 보니, 뭔가 뭉클함이 느껴졌어요.

그 내용들을 정용연 작가와 권숯돌 작가가 감동적인 그래픽노블로 완성해냈어요.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우리도 나가 의병 하러 나가보세~

우리나라 만세로다~ 

안사람 만세로다~ ♪"


할미는 배움이 짧아 조선이 망국에 이른 

복잡한 정세는 미처 알지 못한다. 

하나 이것만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너희 조상 모두가 금전과 권력에 어둡고 

제 한목숨 부지하기 급급한 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304-306p)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지키려 했던 조국.

과연 우리는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제대로 기리며, 가슴에 품었는가를 돌아보게 됐어요.

우연히 어떤 프로그램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을 찾아 사진으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를 보게 됐어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건너간 독립유공자 후손의 사연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왜 우리나라는 친일파 후손은 배불리 잘 살고, 독립유공자 후손은 가난한가요.

아직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어요.


"나에게 단 한 발의 총알이 남아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중을 배신한 매국노, 변절자를 

먼저 처단할 것이다. 

왜? 

그들은 왜놈보다 더 무서운 적이기 때문이다."

   - 백범 김구


윤희순 의사를 비롯한 가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니, 더욱 친일파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어요.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처벌된 적 없는 친일파들,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며, 윤희순 의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요.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어요.



책에 나온 윤희순 의사의 연보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했어요.  <* 괄호 안은 윤희순의 나이.>

1895년(36세)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단발령과 세 번째 변복령이 선포되자, 이즈음 <안사람 의병가>를 비롯해 다수의 노래를 지어 사람들에게 항일 의지를 고취했어요. 

1907년(48세)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어, 정미의병이 일어났어요.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와 화약을 제조해, 군사 훈련에 직접 참가했어요. 

1911년(52세) 의병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어요. 중국 랴오닝성 홍경현 평정산 난천자 마을에서 불모의 땅을 일구었어요. 

1912년에는 중국인들에게 벼농사를 가르쳐주었고, 벼농사를 지어 군자금을 모집했어요. 항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노학당을 창립했어요. 

1914년(55세) 시아버지 외당 유홍석이 서거했어요.

1915년(56세) 남편 유제원이 세상을 떠나고,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폐교되자 푸순 포가둔으로 이주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어요.

1919년(60세) 무오독립선언과 2 · 8 독립선언이 선포되고 3 · 1 운동이 일어났어요. 환인현에서 아들들과 함께 3 · 1 만세 운동을 주도했어요.

1920년경  한 · 중 지사 180여 명과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이끌었어요. 

1926년(67세) 푸순의 조선독립단 학교에 이어 홍경 영릉에 분교를 세워 항일 인재를 키우며 항일투쟁에 나섰어요.

1932년 무순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본거지를 옮겨 지속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했어요. 

1935년 장남 유돈상이 푸순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뒀고, 윤희순은 《일생록》을 남기고 서거했어요. 중국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묻혔어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고, 1993년 장남 유돈상 선생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고, 2000년 사돈 음성국 선생에게 애국장이 추서되었어요.

2002년 중국 랴오닝성 환인현 노학당 분교 터에 노학당 유지비가 세워지고, 독립기념관에 윤희순어록비가 건립되었어요.

2012년 윤희순 의사 묘소를 춘천시 남면 가정리로 이장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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