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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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가장 치명적인 공포는 무엇인가요.

소설이 보여주는 공포는 극히 일부일 뿐이에요.

한 번도 공포를 즐긴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자꾸만 끌리는 이유는 뭘까요.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단편소설집이에요.

이 책을 읽고나서야 진정한 공포가 뭔지를 깨달았어요.

사실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어요. 

뭐지, 그 다음은? 

왜?

......

기존의 호러 소설과는 달랐어요.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선뜻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인데,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드는, 그래서 소름 돋는 상황이에요. 환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점.

우리에겐 현실이 진짜 공포일지도 모르겠네요.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 : 페티소 오레후도를 떠올리며>가 너무 강렬했어요.

주인공 파블로는 관광 가이드예요. 그의 회사에서 제공하는 브에노스아이레스 관광 상품들 중 가장 인기있는 건 범죄 및 범죄자 투어예요.

그는 이 범죄 투어 가이드 역할을 하기 위해 열 가지 범죄 사건을 철저히 연구했어요. 관광객들을 이끌고 에밀리아 바실(토막 살인범) 소유의 레스토랑에서 이야 무라노(독살 살인범)가 살던 건물 등을 다니면서 유머와 서스펜스를 적당히 섞어 가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투어 중 한 코스를 지날 때마다 파블로는 페티소 오레후도가 처음으로 장례식 흉내를 내며 범행을 저질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페티소는 아르헨티나의 범죄자 중 가장 극악무도한 인물이에요. 어린아이들과 작은 동물들을 무참하게 살해했고, 죽은 새들로 가득 찬 상자를 침대 아래 놓고 살았다고 해요. 그는 1944년, 교도소에서 사망했어요. 

그런데 그가 2014년 봄, 현재 파블로가 이끄는 범죄 투어 버스 안에 유령 승객으로 나타났어요.

페티소의 본명은 카예타노 산토스 고디노였지만, 흔히 페티소 오레후도 Petiso Orejudo ('키가 작고 귀가 유난히 큰 남자'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왜 페티소가 자기 앞에 나타났을까. 얼마 전에 태어난 아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파블로는 곧장 돌팔이 심리치료사를 찾아갔어요. 고디노는 어린아이들만 골라 살해했거든요.

페티소는 경찰에 체포된 뒤 조사 과정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해요.


"나만 아이들을 죽인 게 아니라고요. 다른 사람들도 그러잖아요."

"그럼 어린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대체 뭡니까?"

"재미있으니까요."

      (145p)


파블로는 버스에서 페티소의 유령을 봤다고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물론 동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2년 전이었더라면, 당연히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첫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부부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버렸어요. 

아내와 크게 다툰 그다음날, 페티소가 다시 투어 버스에 나타났어요. 그리고...

이 소설에서 느낀 공포의 원인은 페티소 유령이 아니에요. 끔찍한 살인마의 이야기를 듣는 건 찰나의 공포일 뿐.

실제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건 따로 있어요.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살짝 엿본 느낌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왜 공포와 환상을 좋아하는지에 관한 대답으로, 스티브 래스닉 템과 멜라니 템 부부의 지붕의 남자」일부를 소개하고 있어요.

"내가 어둡고 음울한 소설을 쓰는 이유는 세상에서 괴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46p)

저자는 후기에서 우리들의 공포가 거의 대부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공포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작가들이 해야 될 일은 삶과 현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바로 이 소설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미스터리를 "보여주고" 있어요. 설명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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