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이에요.

장르가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에세이와 아주 짧은 소설이 섞여 있는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읽는다는 것, 쓴다는 것, 그리고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제목이 가진 의미가 색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글자에는 질량이 있어, 글자를 쓰면 내게 그 질량만큼의 조금만 구멍이 뚫린다.

... 쓴다는 것은, 자신을 조금 밖으로 흘리는 것이다.

글자가 뚫은 조그만 구멍으로."   (52p)


상상해봤어요. 내게는 글자가 뚫어놓은 구멍들이 몇 개나 될까.

언젠가 마음 속에 담아둔 말들을 종이 위에 써내려가면서 눈물이 났던 적이 있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속상한 마음이 글자가 되어 조그만 구멍이, 눈물샘에서 터졌나봐요.

막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열고 산다는 게 쉽지 않아서, 가끔은 나를 위한 구멍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사실 '구멍'이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본래 의미로 쓰일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나 상황을 일컫는 경우가 많아서 별로였어요.

그런데 '글자가 뚫은 조그만 구멍'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그 구멍이 마치 답답했던 숨통을 트이게 만든 기분이 들었어요.


스무 살 때의 에쿠니 가오리는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지만, 소설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대요. 그 무렵 처음 만난 소녀 같은 세토우치 자쿠초 씨가 "글을 쓰려면, 스트립쇼를 할 배짱이 필요해." 라고 말했는데, 당시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인지라 그 말을 깊이 새기지 않았대요.

스물네 살 때, 페미나 상을 받아 기뻤지만 그때도 글쓰기를 취미라고 여겼대요. 수상식 당일,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그 세토우치 자쿠초 씨에게 "쓴다는 건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열심히 써서 궤짝 한가득 모아놓고, 시작해요."라는 말을 들었대요.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돌아보니, 에쿠니 가오리라는 사람은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으니... 운명이었을까요.

솔직히 자쿠초 씨의 말에 깜짝 놀랐어요. 제가 딱 그랬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면 알몸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쓸 수 없었어요. 물론 작가가 될 실력도 없었지만 배짱마저도 없었던 거죠.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좋은 책을 읽고나면 할 말이 생각나고, 글을 쓰면서 상상 속 작가와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이래서 '쓰는 사람'보다는 '읽는 사람'으로 살고 있구나 싶었어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곳으로 떠나는 일이고, 

떠나고 나면 현실은 비어 버립니다.

누군가가 현실을 비우면서까지 찾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게 되는 책을,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129p)


저자가 세토우치 자쿠초 씨의 일화를 소개한 건 그 분이 쓴 <겸허한 아흔 살>이라는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거기에 '집을 뛰쳐나온 후에도 소설만큼은 하루도 잊지 않았다. 짝사랑의 애틋함을 짊어지고, 그런데도 그 비정한 등에 매달려 살아왔다.', 그리고 '글자를 찍는 기계는 오래전에 샀는데, 한줄을 치려고 연습하는 시간에 몇십 장이나 펜으로 쓸 수 있으니, 연습하는 시간이 아까워 기계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런 글을 무심히 쓸 수 있는 세토우치 씨의 경지는 신비의 베일 너머에 있다고 했어요.

책 속에 담긴 놀라운 힘, 그것은 우리를 머물게 만들고 새롭게 변화시키기도 해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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