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이 근래 바둑계를 은퇴하면서 그 이유를 인공지능(AI) 때문이라고 언급했어요.

AI라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느끼는 허무와 좌절 같은 것이 은퇴를 결심한 직접적인 이유라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인공지능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막강한 존재가 된 것 같아요.

스티븐 호킹 박사는 AI가 인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류가 AI에 대처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AI 기술은 인류문명사에서 최악의 사건이 될 거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어요. 또한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어요. 인류의 표준 같은 건 없지만 뭐든 창조해낼 수 있다는, 인간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삶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그곳엔 항상 우리가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김영하 작가님의 장편소설 <작별 인사>는 인간과 똑같은 휴머노이드가 등장한 미래 세계를 그려내고 있어요.

제목만 봤을 때는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 이야기라고 짐작했어요. 물론 이별 이야기는 맞지만 인공지능, 휴머노이드가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주인공은 열일곱 살의 소년 철이예요. 그의 아빠는 휴먼매터스 랩의 수석 연구원 최진수 박사예요.

어느날 철이는 아빠와 함께 산책을 나왔어요. 아빠는 고양이 간식을 사겠다며 펫숍으로 향했고 철이는 광장 간이의자에 앉아 길거리 연주를 듣고 있었어요.

그때 검은 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리모컨 비슷한 장치를 철이에게 겨누더니 모니터에 R이라는 붉은 글자가 번쩍이는 걸 보여줬어요.

"너, 등록이 안 돼 있는데?"

"등록이라니요?"

"휴머노이드 등록 말이야. 칩이 감지되지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인간인데요. 휴머노이드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 기계는 실수하지 않아."

"인간은 청색으로 H라고 뜨지. 인간에게서만 방출되는 방사성 원소가 있거든. 너한테는 그게 나오질 않아."

"정말 감쪽같아. 우리도 네가 인간인 줄 알았어. 칩이 없는 게 당연하네.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있으니.

99퍼센트 비슷해도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런 말 알아? 비슷한 것은 가짜다."  (26-27p)


철이가 살고 있던 곳은 평양의 도심이에요. 단지 평양이라는 지역명만 나오지만 저절로 한반도의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네요.

SF영화에서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상상한다는 자체가 새로운 것 같아요.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언젠가는 변할 텐데 말이죠.

광장에서 붙잡힌 철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임시 대피소 같은 넓은 건물 안이었어요. 다양한 기종의 휴머노이드와 로봇들이 오가고 있었어요. 철이 옆에는 예닐곱 살 되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서 있었어요. 자신을 민이라고 소개한 그 아이는 여기에선 로봇인 척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해줬어요. 기계들은 인간 비슷한 건 다 싫어한다고.

애꾸눈의 남자가 철이에게 다가와 시비를 거는데 웬 여자아이가 나타나서 구해줬어요. 민이가 말했던 선이 누나. 

선이는 이곳이 정부가 무등록들을 잡아다가 가둬놓는 곳이라고 했어요. 처음엔 발견 즉시 폐기했는데 외국의 휴머노이드 권리 단체의 항의와 유엔의 권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둬놓은 거라고 했어요. 휴머노이드들끼리 몰아둔 이곳에는 크게 세 부류가 있어요. 자신들이 기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휴머노이드들이 기계파였고, 선이처럼 인간인 경우한 또 한 부류, 민이처럼 인간의 기능을 그대로 가진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들이 또 한 부류였어요. 기계파는 인간과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들을 구분하지 못해 모두 싸잡아 조롱하고 괴롭혔어요. 선이는 용케도 이들 사이를 중재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편안하고 안락한 아빠 품에서 살던 철이가 하루아침에 낯선 무법천지 공간에 떨어졌을 때, 그제서야 철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휴머노이드.

문득 궁금해졌어요.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철이가 겪게 된 혼란과 시련은, 어쩌면 곧 우리에게 닥칠 현실인지도 몰라요. 

인류 멸망을 피하려면 AI를 경계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을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본문 중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말은 

『맹자』의 「진심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사이비(似而非)라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을 다룬 정민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책의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17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