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밥 딜런이라고, 오바마의 노벨평화상과 같은 느낌이라는 반응도 있고 또 받을 만 하다는 반응도 있고 그러하다. 노벨문학상은 작품에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주는 것이니까 그러려니, Literature의 의미를 되새기면서도 못내 아쉽다. 이 시대에도 여전한 제국주의 문제를 고발하는 응구기 와 티옹오가 받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원래 나의 계획은 읽던 책들을 완독 후 리뷰를 쓰는 것이었다.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 상권을 읽기는 하였지만 아직 하권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원래 이 책, 저 책 찔끔찔끔 읽지 않는데 요즘은 시간 날 때 마다 읽으니 전자책도 건드리고 종이책도 건드리고... 이제 곧 11월이고 연말인데 그 동안 어떤 책들을 읽었나 정리하는 과정에서 또! 읽고 싶은 책들이 하나씩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중에서 다시 언급해볼만한 책으로 『분노의 날들』이 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찾아보니 1989년에 발표되었으며, 페미나 상 수상작이었다.
실비 제르맹, 작가도 멋있고 소설 제목도 넘넘 멋있고 표지까지 나무랄 데가 없다. 게다가 줄거리는 또 어떠한가. 마을의 부호가 배우자를 살해하는 과정을 목격한 벌목꾼이 그 시신을 보고 사랑을 느끼고, 부호의 모든 것을 빼앗은 뒤 그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완전 성인용 아닌가. 내 스타일이다. 제인 오스틴 스타일을 좋아하던 내 취향이 사뭇 변하는 것 같은데... 스트레스가 많은걸까, 아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는가. 『독거미』도 그렇다. 예전같으면 절대로 보지 않았을 타입이다. 근데 좋더라고...
빨리 리뷰를 하나 쓰자는 생각에 저번에 보다 말았던 『소네치카』를 다시 펼쳤다.(응구기 와 시옹오도 울리츠카야처럼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억으로는 두번째 단편을 읽다가 덮었던 것 같은데, 표제작이라도 읽고 리뷰를 쓰자 싶었기 때문. 사실 문학과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감정에 대해 쓸 요량이라 읽기로 한 것인데 이게 또 볼수록 묘하다. 울리츠카야의 소설은 페미니즘 문학으로도 볼 수 있다, 러시아식 리얼리즘을 담은 작품들이다- 이런 해설을 보니 좀 더 깊이 읽어야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네치카는 굉장히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여성상으로, 러시아판 『여자의 일생』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독서중에 계속 떠오르기도 한다.
어릴 적에 읽었던 모파상의 작품은 끔찍하게도 싫었다. 잔느의 삶이 굉장히 체념적이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때야 성애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는데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이런 것이다. 낭만적인 첫날밤을 고대하던 소녀(수녀원에서 자라 이 소녀도 잘 모름)... 술냄새 나는 입김이 얼굴에 쏟아지고 털이 숭숭 난 차가운 다리가 제 허벅지를 벌리고 너무 아픈 무엇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그 고통. 행위가 끝난 뒤 등을 돌려 누워 코골며 자는 남자까지 아주 그냥 총체적 난국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국딩 시절에 이 책을 읽었는데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작품을 펼치지 않은 것은 그 때 느낀 혐오 때문이었다. 지금 읽으면 어떨런지.
찾아보니 원제는 『어떤 인생Une vie』인데... 어감이 너무 다르지 않나? 이 기구한 인생이 어딜 봐서 여자의 것이더냐. 물론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영 아닌 제목은 아니지만 그래도 잔느가 너무 불쌍하다. 로잘리는 어떻고. 악덕 속에서 순수를 지키며 사는 것은 이리도 어려운가 보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테스』의 경우는, 숲 속의 이슬이 내리는 가운데 잠이 든 테스의 입가에 알렉의 숨결이 내리앉았다던가... 그런 문학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 다음 파트에서 테스의 배가 불러 있어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이해가 안 되는 작품들이 많았고 그냥 감정선만 따라가며 책장을 넘겼었다.
다시 소네치카로 돌아와, 이 소네치카라는 인물도 남편을 공유하는 아샤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참 놀랍다. 잔느의 체념적 상황과 달리 소네치카는 굉장히 기쁘게, 빌린 물건을 돌려주듯 남편을 내어준다. 이게 뭐랄까 일종의 일부다처를 연상시키는데, 흔히들 일부다처라 하면 남성이 여성을 거느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이 남성을 공유하는 것에 가깝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선시대 축첩 같은게 아니라, 그 왜 아랍 쪽에도 보면 1부인, 2부인 똑같이 대우해야한다고 차별하면 안 된다고 율법에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게 골치 아파서 여러 부인 들이지 않는다고....
아무튼 소냐와 아샤, 타냐, 로베르트 이 네 사람의 관계는 각자 기묘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작품 자체가 철저히 여성 위주로 서술되는 분위기다. 각 등장인물의 출연 분량이 1/4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냐는 아샤를 비난하지 않으며 남편도 딸도 내어주고, 동시에 아샤를 딸로 받아들여 아낀다. 오히려 의붓딸 포지션의 아샤를 취하는 로베르트에게 금기를 어긴 어떤 화살이 돌려지는 느낌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벌을 받지도 않으며 꽤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해설을 보니 러시아 문학 속의 여성상들이 스쳐간다는데 이게 마더 러시아, 대지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깊은 애착으로도 읽히는 것이다. 마더 러시아, 마더 러시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표제작만 읽어서 울리츠카야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머지 작품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뷰를 써도 이 페이퍼와 감상이 달라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완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