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 이어서)
나치의 음악 정책에서 베토벤 음악은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1933년 나치 정부 초기, 1차 대전의 패배감으로 인한 독일인들을 강한 독일 제국의 건설로 회유하기 위해서는 음악의 힘이 필요했다. 회의와 의심을 믿음과 동의로 전환시키는데는 말과 논리보다 음악이 탁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때 베토벤은 독일인의 우월성을 확인할 대표적인 음악가로 부각된다. 거의 모든 나치 기관의 오케스트라는 행사에 관계없이 베토벤 곡을 연주했다. 민족의 영웅인 베토벤에 대한 지지는 민족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히틀러에게로 전환되었다.
베토벤은 독일인의 우월성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나치 정부의 평화적 외교관으로서도 기능했다. 1936년 올림픽에서, 히틀러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의 합창 〈환희의 송가〉를 6,000여 명의 중·고등학생을 동원하여 개막식에서 부르게 한다. 유대인에 대한 테러로 빈축을 샀던 독일 정부를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환희의 송가〉로 평화적인 정부라 눈가림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나 나치 반대자들에게도 베토벤의 음악은 ‘자유의 이상이 표현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고, 그보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수용소와 게토에서 비인간적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했고, 가스실에서조차 〈환희의 송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나치 음악 정책의 성공은 이러한 모호함과 이중성으로 희생자들에게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에 있다. 나치들은 모든 예술음악을 이용했는데, 여기에 제외되는 것은 현대음악과 재즈, 유대인이 작곡한 음악이었다. 나치 문화부장관 괴벨스는 “독일 음악”은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운명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영적 영역에서 투쟁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음악에서 이성보다 감성을 강조하고, 청취시 회의나 의심보다 믿음과 경건함이 요구됐다. 1936년에는 모든 예술의 비평 자체가 금지되는데 이 또한 의견의 대립이나 논쟁, 불안과 의심의 제거라는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외적인 현상을 볼 때는 매우 모순적이지만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의 분노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나치문화정책의 전반적 특징이었다. 이를 통해 나치가 음악을 이성과는 관계없는 감성적인 것으로 선전하면서도, 실제로는 음악의 효과를 얼마나 진지하고 이성적으로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치와 협조하면서 ‘나는 음악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친나치 음악가들의 주장은 결국 변명에 불과하다.
전후 독일에서 유대인과 망명인들은 여전히 냉대받았다는 인상이 있다. 종전 직후, 독일에서 음악 생활을 조직하고 지휘한 이들이 주로 독일에 머문 음악가들이기도 했으며, 독일이 다시 나치화될 가능성과 경제적 이유 때문에 망명을 떠났던 독일인들이 다시 돌아오기 힘든 여건이었다. 그러나 머물렀던 자와 떠났던 자의 감정의 골이 당시로서는 극복하기 힘들 정도로 깊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큰 이유였다. 이후 서독과 동독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인한 음악의 형식과 내용이 구분되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1970년대가 되어서야 서서히 극복되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에서의 참패 이후, 연합군에 의해 지배된 독일. 1947년까지 독일문화계 분위기는 자유로웠으나 미·소가 냉전으로 돌아서면서 달라졌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끝난 1950년대 서독에서는 ‘다시 나치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고 이제 ‘과거 청산’은 중요하지 않았다. 책임자가 아니었던 많은 관리들은 나치 시기 유지했던 직업을 서독에서 그대로 수행하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판결받은 사람들은 사면과 복권의 혜택으로 사회에 복귀했다. 새 독일의 건설을 위해 미군은 관료로서 전문 경험이 있는, 철저한 반공산주의자 독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음악계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트라우스, 푸르트뱅글러, 카라얀도 과거 문제로 비난받고 조사받았다. 그러나 유대인 예술가, 나치 치하 위험에 처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었다는 것이 증명되면 비난에서 어렵지 않게 벗어났다. 나치 당원이 아니었던 음악가들은 ‘예술가로서 예술만 했을 뿐’이라며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나치 당원이었다 할지라도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변명할 수 있었다. 문서로 증거를 남긴 비평가, 학자들도 형식적 수준에서 ‘탈나치화’ 과정을 거친 후 서독 연방공화국에서 다시 일할 수 있었다.
독일의 과거 청산은 정부 차원에서, 전문가와 학자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독일이 일본보다 ‘역사 청산’이 상대적으로 잘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역사 인식의 문제, 경제적·정치적 문제이다. 독일인은 나치의 과오를 벗지 않고 파시즘적 분위기가 확산될수록 국제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매우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치의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교육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음악 때문에 살았다.’ 혹은 ‘음악만 했다.’ 그렇다. 음악에는 핏자국이 없다. 하지만 거기에 파고들었던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아직도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