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 헝가리어-한국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최초의 수용소문학이었고 내용은 어렴풋하나 책을 읽다 여러 번 헛구역질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지만 막상 책을 펼쳐도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 이 영화가 떠올랐다. 사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을 맞이하는 것은 다소 피로한 감이 있다. 역사와 그 희생자들을 욕되게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비극이 소비되는 방식이 다분히 상업적이면서도 건드릴 수 없는 성스러운 반열에 올라있다고 해야 할까.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를 유대인이 독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단순한 구분 같은, 그리고 비극이 그려지는 방식의 폭력성과 자극같은 것들 말이다.
《사울의 아들》은 독특하고 불친절한 영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일어난 존더코만도 봉기를 배경으로, 존더코만도 사울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시각이란 화면을 사울의 시선이 머무는 프레임에 가둬놓은 느낌, 영화기법은 잘 모르겠다. 관객은 사울이 보고 듣는 정보만 취하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1인칭 시각만으로 진행되지도 않으며, 모든 언어가 번역되어 자막에 뜨지도 않는다. 특히 가스실에서 시신들을 아웃포커스로 빼고 텅 빈 사울의 얼굴을 잡는 장면이 영화를 본 지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존더코만도는 기차를 타고 온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데려가고 이후 시체를 처리하는 작업반이다. 동족을 배신하고 나치의 범죄를 도운 대가로 수용소 내에서 약간의 자유와 보상을 받고 4개월 후면 자신도 가스실로 가야하는 운명의 사람들….
영화의 시작. 사울이 기차역에 나와 있고 화면은 가스실로 옮겨진다. 번호순으로 걸린 옷과 신발을 정리하고 피투성이가 된 바닥을 닦고 시신들을 옮기고…. 『운명』을 보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죄르지가 듣는 것이 사이렌 소리 그리고 여러 언어들이다. 이윽고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지치거나 병들었다고 하지 말고, 쌍둥이도 안 되고 어리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특히 죄르지에게 열여섯 살이라고 하라고 한다. 의사 앞에 섰을 때, 조언대로 나이를 속이고 생존 그룹에 합류한다. 죄수복을 입은 사람은 계속 나온다. 목욕하기 전 나치 장교의 말을 옮기거나,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들은 모두 이들의 입에서 나온다. 아마도 이들이 존더코만도였으리라. 사울은 4개월의 유예 기간이 다 되어가는 존더코만도의 일원이다. 마지막 존더코만도이기도 하다.
여느 때처럼 가스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소년이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의사는 소년을 질식사시키고 부검을 위해 시신을 옮기라고 한다. 사울은 의사에게 아이를 묻어주고 싶으니 부검을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한다. 유대교식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랍비를 찾아 수용소 곳곳을 넘나든다. 실랑이하던 랍비는 사울 때문에 죽게 되고 사울은 소년의 시신을 찾아 숙소에 숨긴다. 사울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개다. 하나는 소년을 묻어주기, 다른 하나는 존더코만도들의 봉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사울은 무척 바쁘다. 랍비도 찾아야 하고, 누가 작업을 시키면 그것도 해야 하고 봉기를 위해 여성들이 있는 구역으로 가 화약도 가져와야 한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울에게 동료가 묻는다. 아는 애야? 의사가 묻는다. 아들인가? 동료가 말한다. 자네는 아들이 없잖아.
소년을 묻어주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봉기에 집중하는게 더 중요할까? 어느 쪽이든 목숨을 걸어야 한다. 랍비를 찾는 과정에서 그리고 명령불복 때문에 사울은 정말 죽을 위기들에 처한다. 고생해 얻은 화약은 랍비를 챙긴다고 잃어버린다. 이번에 가스실에서 발견한 옷들은 존더코만도들의 것이다. 봉기가 시작되고 사울은 소년의 시신과 랍비를 데리고 달아난다. 왜 그랬을까? 대의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하지 않았을까? 소년을 묻어주겠다며 고군분투하는 사울…. 존더코만도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나치의 기만성은 아주 교묘한 것이어서 겁에 질린 유대인들을 동족의 목소리로 꾀어낸다. 탈의한 옷을 건 자리번호 잘 기억해두고 신발은 짝을 잃지 않게 끈으로 잘 묶어 두세요, 같은 말들. 탈의실을 빨리 정리하고 다음 희생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만. 이 모든 것은 유대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시신을 치우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누가 견딜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이들을 가스실로 데려다주며 베풀었던 위선을 어떻게 견딜까. 나치가 명령하고 존더코만도가 수행하는,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행위. 그들은 민족을 배신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에 깊이 몸을 담금으로써 나치의 행위에 동조한 가해자가 되었다. 존재가 증거이기에 4개월 후 가스실로 향할, 자신의 유한한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이후 『운명』을 읽은 것이 수용소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기차가 수용소 안까지 들어가고 구령에 맞춰 모자를 벗었다 썼다 하고. 그리고 사울의 미친 것 같은 행동, 자신과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소년을 묻어주려는 고집을 말이다. 죄르지가 수용소 생활을 견디는데 필요한 것을 꼽으면서 고집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에게는 기억 속의 고향, 누군가에게는 타인을 보살피는 애정 같은 것들. 고집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 고집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살아가는 당위를 부여한다는 데서는 동일하다. 그렇게 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고집을 내세우는 이유. 그것은―모든 것이 가능하고 또 불가능한, 철저하게 이성적이지만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광기가 맴도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서―인간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아니,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바로 이 고집이다. 죽음을 만지고 죽음으로 가고 있는, 아니 이미 죽어버린 어쩌면 미쳐버린 사울이 소년를 묻어주려 하는 것. 살아났으나 다시 죽어버린 소중하고 작은 생명에 대한 애도는 화장터에서 끝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영화가 남기는 울림은 마지막 장면에서 더 커진다. 독일 소년과 눈이 마주친 사울이 환하게 웃는 것. 자신이 지키려던 어린 것이 살아 있다.
비극의 재현불가능성을 논할 때, 우리는 상상에 의한 제한을 경험한다. 영화나 드라마같은 재현에서는 주어진 정보만을, 행간을 읽는 장면에서는 우리 스스로의 상상에 말이다.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제수용소가 있었대, 가스실이 있었대, 600만명이 희생됐대- 이런 사실은 비극을 실감하기 위한 현실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비극을 미학화하고 기억으로 오염된 증언들을 전달함에 있어 이 용어가 강조되는 이유기도 하다. 손에 피를 묻히고 고군분투하는 사울과 존더코만도, 사울에게 춤 춰보라며 조롱하는 젊은 장교들, 그리고 동정을 보이는 의사…. 과연 비극의 한 가운데 있던 독일 장교들은, 자신이 명령했던 그 비극의 속성을 제대로 알고 이해했을까? 진짜 비극을 경험한 사람들은 가스실에서 사라졌다는 프리모 레비의 말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그들을 위한 장례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