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4 - 현대편 - 상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1 4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정병수 그림, 최수민 옮김 / 꼬마이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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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두 개의 제국, 두 번의 반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아체 왕국의 전쟁.

네덜란드는 인도에서 향료 등을 사오기 위해 인도 곳곳에 무역항을 설치했다. 대부분 동쪽에 몰려 있던 무역항을 내덜란드 정부가 동인도 회사로부터 지배권을 물려 받았다. 동인도 제도가 네덜란드의 일부가 된 것이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 북쪽의 수마트라 라는 섬도 탐내 했는데, 영국또한 이 섬을 탐냈다. 이 두나라는 1824년 합의 끝에 영국이 점령한 싱가포르를 네덜란드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인도에 있는 네덜란드 소유의 무역항과 거류지를 영국에게 넘겨주는 대신 수마트라 섬을 네덜란드가 독차지 한다는 결론을 냈다.

그러나 수마트라 섬에는 ‘아체’라 불리는 작은 왕국이 있었는데, 네덜란드는 영국과 이 왕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 땅은 네덜란드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신의 농장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자 토후(부족의 수장이나 실력자)들에게 농장에서 나온 작물의 일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토후들은 농부들을 몰아세워 네덜란드인들의 농장에서 일을 하게 했고, 농부들은 지쳐갔다. 그러자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봉기를 본 네덜란드 정부는 아체 왕국이 봉기를 부추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영국과 ‘수마트라조약’을 체결했다. 수마트라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아체왕국을 쳐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1873년 네덜란드는 아체 왕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디엔이란 젊은 여전사가 있었는데 그녀는 언제나 전쟁터에 나와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한 번은 항북을 하러 온 것처럼 위장하고 네덜란드 기지에 들어와 무기와 정보를 빼낸 적도 있었다. 디엔은 1901년 체포되었고, 네덜란ㄴ드는 1903년 아체왕국을 점령했다. 30년이나 걸린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는 동인도에서 번 돈을 몽땅 써야 했다.

 

유럽의 병자 오스만투르트제국

오스만 투르크는 술탄이라 불리는 황제의 낭비로 갈수록 허약해 지고 있었다. 이런 오스만투르크를 러시가가 차지하고 싶어했다. 러시아는 영국과 손을 잡고 싶었으나 영국이 이를 거절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아브뒬라지즈는 투르크 제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불가리아의 혁명가들이 일으킨 혁명에서 1만 2천여명의 불가리아 사람들을 죽였다. 이런 아브뒬라지즈는 이 사건으로 술탄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후 무라드5세가 술탄이 되었으나 그는 너무 멍청했다. 이 술탄도 시골구석으로 보내지고, 다음왕으로 아브뒬하미드2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술탄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다시 살려보려 했으나, 불가리아 인을 학살할 때 기독교인들을 죽였다는 핑계로 러시아가 쳐들어 왔다. 불가리아 인들은 러시아 군에 합세했고, 이 전쟁으로 아브뒬하미드는 불가리아 독립 조약에 서명을 했고, 오스만 투르크 제도의 절반을 잃었다.

 

 

 

 

10장 세상에서 가장 메마른 땅, 동양을 잇는 운하

 

페루, 볼리비아, 칠레가 벌인 ‘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 서쪽지역에 위치한 세 나라 페루, 볼리비아, 칠레는 아타카마사막을 두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 지역은 산이 비바람을 가로막아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비그늘 지역이라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땅이었다. 볼리비아와 칠레 사이에 위치한 그 사막은 국경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 아카타마 사막은 너무 건조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지만, 광물질과 화학물질이 가득했다. 칠레의 광부들이 구리와 질산나트륨을 캐러 아타카마 사막에 들어갔고, 이를 본 볼리비아는 그 사막이 볼리비아 것이라며 세금을 내라고 했고, 이로 인해 어디까지가 볼리비아의 국경인지에 대해 입씨름이 벌어졌다. 볼리비아는 너무 화가 나 칠레의 광산 회사가 아타카마 사막에 세운 건물과 광부들이 쓰는 연장과 캐어놓은 광물들을 빼앗아 경매로 처분하겠다고 선언했다. 경매가 열리기로 한 날 칠레군대가 아카타마사막 해변에 자리잡은 볼리비아 항구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했다. 그 항구를 점령한 칠레는 아카타마 사막이 칠레의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에 볼리비아가 선전포고를 했다. 볼리비아는 6년 전 페루와 동맹을 맺었고, 이 전쟁에서 볼리비아는 페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사막은 전쟁을 치르기 너무 어려웠으므로 태평양에서 전쟁을 치뤘다. 이것이 ‘태평양 전쟁’이다. 이 전쟁은 페루와 칠레의 전쟁이 되어버렸다. 칠레는 해군이 무척 강했던 반면, 페루의 해군은 약했다. 그러나 함장 미겔그라우의 지휘로 칠레를 6개월동안 잘 막았으나 결국 패했다. 육지에서의 전쟁으로 옮겨갔으나 이 또한 칠레의 승리였다. 페루는 3년동안 항복을 하지 않다가, 남쪽해안선 일부를 칠레에게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칠레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칠레는 아타카마 사막을 독차지 했고, 볼리비아는 육지에 갇힌 나라가 되어 버렸다.

 

지중해와 홍해를 이은 수에즈 운하

오스만 투르크의 무함마드 알리는 오스만투르크 변방이 되어버린 이집트의 권좌를 빼앗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무하마드는 이집트를 유럽의 여는 나라처럼 만들기 위해 유럽 교수를 초청해 학생들에게 유럽에 관해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수단을 침공해 땅을 넓히고, 프랑스 군인을 고용해 병사를 훈련시켰다. 이집트는 날이갈수록 강해 졌다. 무하마드가 죽고 사이드파샤가 뒤를 이었다. 그는 유럽의 모든나라가 이집트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가 지중해남쪽해안과 홍해를 잇는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제의를 했는데 이를 사이드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 운하는 유럽에서 동양까지의 뱃길이를 무려 9600km짧게 하기 때문에 유럽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데에 10년이란 기간이 걸렸고, 다음 통치자인 이스마엘 파샤가 운하건설을 완성지었다. 그는 이집트를 여러방면으로 발전시키고자 철도를 놓고 여자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실행하는라 엄청난 돈을 썻고 급기야 어마어마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를 넘겨 줄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이집트 정부까지 프랑스 등의 다른 나라에게 넘겨 주었다. 이스마엘 피샤는 강제적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계속해 영국의 간섭을 받게된 이집트 군대는 반란을 꾸미다가 영국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집트는 영국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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