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계 조선 제 1대 왕(태조)

 

     출생-사망 1335.10.27-1408.6.18

      가족 첫째부인-신의황후 한씨/둘째부인 성덕왕후 강씨

               아들 이방우,이방과(정종),이방의,이방간,이방원(태종)

                딸 경신,경녀 / 아들 이방번,이방석 경순공주

      특징 조선 건국 (1392년 왕위에 오름.)

      정책 국호를 ‘조선’으로 제정 (고조선계승),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

 

 

 

이성계의 최 측근 인물 정도전. 그는 신진사대부의 중심인물로 외가가 노비라는 신분적 제약 으로 크게 쓰이지 못했으며, 권문세족의 미움을 사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고려 말, 고려가 다시 재기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성계와 손을 잡고, 권문세족을 몰아내어 조선 건국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정도전과 같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역성혁명(왕가의 성씨가 바뀌는 것)을 주장한 사람들을 혁명파 사대부라고 하며, 고려 왕조 틀 안에서 전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파 사대부라고 한다. 온건파의 중심인물로는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한 정몽주가 있다.

정도전이 꿈꿨던 나라는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중심이 되는 나라였다. 그는 특히 민심의 마음을 중요시 여겼으며, 민들의 마음이 떠나면 왕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하였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도 확립하였다.

정도전은 평생 이성계의 최 측근 인물로 살며, 후에 태조 이방원과 대립하다 제1차 왕자에 난에서 제거된다.

 

 

 

이성계 인생의 터닝 포인트위화도 회군이었다. 원나라를 장악한 명은 1387년 고려에게, 공민왕이 원나라로부터 되찾은 철령 이북(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에 위치) 땅을 요구했다. 친원외교를 주장하던 우왕 때의 조정은 논의 끝에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성계와 친명사대론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들은 요동정벌에 반대의 뜻을 밝혔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해서는 안되는 4가지 이유인 4불가론 까지 제시하였지만, 1388년 최영이 정벌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우군 도통사로 요동정벌에 따라나선 이성계는 명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심했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 보내 죽이고, 우왕도 폐위 시킨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렇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부담을 안겨주던 사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제도개혁을 실시했다. 1391년 토지제도 개혁은 과전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과전법에 따라 토지제도 문란이 해소되었고, 농민의 생계가 안정되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개혁 조치의 시행을 바탕으로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되었다.

 

 

 

이성계의 삶의 끝은 명쾌하지 못했다. 후계자를 정하는 데 있어, 둘째부인의 뜻대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가, 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었다. 정도전, 남은, 이제 그리고 방석과 방번은 모두 방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지위 명예, 자부심까지 모두 잃은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 태상왕이라는 칭호를 얻지만, 그저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이었다. 아들인 태종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방원을 상대로 조사의 난까지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그 후로, 체념하여 살다가, 1408년 5월 14일 향년 74세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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